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수 Dec 13. 2020

20세기 과학 혁명을 이끈 과학자들에게서 배운 것

매튜 스탠리 저, <아인슈타인의 전쟁>에 대한 서평





1919년 11월 7일자 런던타임스


                  “과학 혁명. 우주의 새 이론: 뉴턴의 생각들이 뒤집히다!”


1919년 11월 6일 왕립 학회의 회의실에서는,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이 이끄는 탐사대가 1919년 5월 29일에 아프리카 대륙 서쪽 기니만의 프린시페섬에서 수행한 개기일식 관측 실험결과에 대해 발표하는 회의가 열렸다.해당 실험에서는 태양에 가려 보이지 않아야 할 별빛이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진행 방향이 꺾이면서 지구에 다다른 것이 확인되었고, 에딩턴은 이를 통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중력 법칙에 따라 빛이 휘어진다는)이 증명되었다는 발표를 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1919년 11월 7일, 아이작 뉴턴에 대한 자부심에 대단했던 영국에서는 위와 같은 기사가 나왔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과학


나는 원래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 가장 즐겨보던 책이 '앗 이렇게 재미있는 과학이' 시리즈였다. 



추억의 책... 물리가 물렁물렁 ㅋㅋ


고등학교 문과, 법대, 로스쿨 등을 거치면서 과학과는 매우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때 스티큰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읽으며 매우 흥미를 가졌던 기억이 난다. 가끔 고등학교 1학년때 공통과학을 배운 이후로 과학에 대한 흥미가 급감하지 않았더라면 문과가 아닌 이과로 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과학 이외에 흥미를 가졌던 것은 역사였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정규교과 과정을 맛보면서 과학과 마찬가지로 역사학에 대한 흥미도 조금 사그라들었다. 나 말고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흥미를 잃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안타까운 공교육... ㅜㅜ 

아무튼 이런 이유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과학 & 역사 지식들은 중학교 입학 전에 습득한 것이 많다(업데이트가 매우 안되고 있다). 


그렇게 과학과 역사에 대한 관심을 잠시 뒤로 제쳐두고 전공 공부와, 진로, 생업에 시간을 쏟다가 정말 오랜만에 과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책을 읽게 되었다.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을 다룬 과학사 책인 매튜 스탠리 저 <아인슈타인의 전쟁>이다. <아인슈타인의 전쟁>을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은 우선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 매우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특수 상대성 이론, 일반 상대성 이론, 등가원리와 같은 것에 대해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의 전쟁>을 통해 해당 이론이나 원리에 대해 더 상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전쟁> 83면. 등가원리에 대한 일러스트레이션.


이 책의 또다른 좋은 포인트로는 풍부한 배경지식을 균형있게 서술한 점을 뽑고 싶다. 이 책은 물리학 이론에 대한 책이 아니고, 오히려 과학사, 인물, 이론의 배경에 초점에 맞춘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의 위대한 과학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관련해서 당시 세계 정세, 과학계의 동향, 동료 선후배 과학자들 등 여러 배경지식을 약 600페이지에 걸쳐서 풍부하게 기술하고 있다. 예전에 보았던 과학책과 달리 이 책을 통해 아인슈타인, 에딩턴 등과 같은 과학자들의 이론이나 업적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과 생각, 고뇌까지 알 수 있었고 또한 이를 통해 한 가지 배움을 얻게 되었다. 



아인슈타인, 에딩턴, 플랑크: 소명의식으로 뭉친 과학자들


아인슈타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구에 임했을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인슈타인은 마치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연구에 임했다. 신을 숭배하는 성직자처럼 자연법칙에 자체에 대해 경이와 숭배를 가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구성되는 데 토대가 된 기본 원칙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마음가짐은 종교적 숭배자나 연인의 그것에 가깝습니다. 매일 매일의 노력은 계획된 의도나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곧장 나옵니다."
 - <아인슈타인의 전쟁>, 369면.


아인슈타인은 인격적인 신에 대한 믿음에 관심이 없었지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은 종교 그 자체였다. 아인슈타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명예나 물질이 아닌 '가슴에서 나오는 무언가'였다. 성직자들이 매일 성서를 묵상하고 신을 경험하고자 구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기본법칙에 대해 사유하고 사유하고 또 사유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를 통해 얻어낸 아이디어를 경험과 대조하는 작업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책상에 앉아 우주의 본질을 차근차근 추론하는 이성적인 천재. 이것이 아인슈타인이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인들이 꿈꿨던 거처럼 순수 사유로 현실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아인슈타인의 전쟁>, 109면.
"물리학의 지상 과제는 보편적인 기본 법칙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법칙으로부터 순수한 추론을 통해 우주를 점차적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으로 가는 논리적인 경로란 없습니다. 경험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기초로 한 직관만이 그 법칙에 가 닿을 수 있습니다." - <아인슈타인의 전쟁>, 369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입증한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 또한 소명의식으로 뭉친 과학자였다. 그는 뉴턴이 거의 신처럼 받들어지던 영국의 과학계에서 '적국의 과학자'로 폄하되던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진가를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에딩턴은 상대론의 중요성과 그것이 불충분한 자원을 투입할 만큼 흥미로운 주제라는 점을 영국 과학계에 설득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낯선 땅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다. 그에게 필요했던 건 성경, 즉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것이 상대론이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근본적인 텍스트였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영어로 쓰여 있어야 했다. 아인슈타인이 그것을 쓸 가능성은 없었으니 그 얘긴 곧 에딩턴이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에딩턴은 자신이 상대론에 완전히 숙달했다고 느끼자마자 자리를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나라를 새로운 믿음 체계로 개종시키려 할 때 흔히 그런 것처럼, 영국의 현지인들에게는 뉴턴이라는 자신들만의 신이 있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뉴턴식 체계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고 에딩턴의 선교 노력을 환영하지 않았다.
- <아인슈타인의 전쟁>, 340면.


에딩턴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실험과 검증을 거쳐 증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구자금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통해 영국 정부에 연구자금을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과 독일은 1차 대전 중이었고, 캠브리지 대학과 영국정부는 적국인 독일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돈과 자원을 들여서 증명하겠다는 에딩턴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또한 적국의 학자가 쓴 논문인 '상대성 이론'도 영국인들이 아예 읽지 못하도록 금서 조치까지 취했다. 이 과정에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일부 교수들은 에딩턴을 전쟁 중인 적국인 독일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자'라고 거침없이 비난하기도 하였다. 


막대한 돈과 자원이 없이는 상대성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던 에딩턴은 한동안 고민에 빠졌고, 마침내 심사위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에딩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과학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truth) 입니까. 아니면 국가입니까? 영국과 독일이 국가 간 전쟁 중이라고 해서, 또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터에서 적국 독일놈들에게 잃어버린 아픔이 있다고 해서, 독일 과학자가 보여준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진리(truth)를 추구하는 과학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까?"


(참고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2504)


에딩턴은 그 누구도 자신의 계획을 환영하지 않았던 영국에서, 심지어 자신이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오로지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담대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 글의 첫 단락에 있는 바로 그 기사이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또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과 마찬가지로 소명의식으로 뭉친 과학자였다. 막스 플랑크는 흑체복사에 대해 연구하다가 양자역학의 성립에 핵심적 기여를 한 과학자이자 플랑크 상수의 발견자로, 1918년에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하였다. 



참고 : https://news.samsungdisplay.com/18698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60세 생일 파티에서 "만일 우리가 개인적 야심을 위해 혹은 실용적 목적을 위해 과학을 추구했던 사람을 몰아낸다면, 아주 소수의 사람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플랑크는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의 평대로 플랑크는 개인적 야심이나 실용적 목적을 위해 과학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당시 나치 지도층에게 할 말을 하는 담대한 모습을 보였다.


플랑크는 과학자의 양심을 가지고 유대인이었던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를 변호하였고,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발굴해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플랑크는 반유대주의에 집착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아인슈타인과 에딩턴, 그리고 막스 플랑크. 모두 개인적 성취나 명예, 돈을 좇기보다는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 과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이 세 과학자를 통해 나는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는 어떠한 자세로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해나갈지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470918


작가의 이전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원동력. 종교적 민족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