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Q 77 아이큐 77 제1화 06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아이큐 77
06
고칠씨는 김씨가 아닐 수밖에 없는지를 이젠 알지만, 그때 만해도 왜 혼났는지 영문을 몰라 너무 마음이 답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울하기도 해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우물가에 갔다는 것이다.
우물가에 가니까 같은 반 친구들이 고칠이를 놀려대며, 히죽거렸다.
“고칠아, 너네 아빠, 정말 너네 아빠냐? 너네 아빠는 이씨인데 또 김씨 아빠가 있나보네, 히히."
“고칠이는 아빠가 둘이래요, 깔깔.”
뭔 말을 하는지, 고칠이는 친구들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이고칠' 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데.
"얘! 친구들아, 우리 딴 거 하고 놀자, 나 그것 때문에 엄마한테 엄청 혼났거든."
그러더니, 고칠이가 원기둥 모양의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우물 속에는 가끔 아이들이 놀다가 빠뜨린 장난감이 있어서다.
이게 웬 떡인가.
고칠이는 "비싼 로봇 장난감이 하나 빠져있다."며, 우물 속에 얼굴을 깊숙이 들여 밀었다.
진짜일까. 호기심에 친구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런데 장난 끼 많은 요정의 장난일까.
고칠이는 자신이 먼저 장난감을 갖고 싶어 손을 쭉 뻗어 잡으려다, 그만 우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높이는 한 2, 3미터 정도나 됐다. 으악! 큰일이다. 올라갈 수가 없는 거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잔뜩 겁에 질린 친구들과 고칠이의 거친 다급한 아우성이 경고음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우물가 앞에 사는 잘 생기고 훤칠하게 키 큰 한 대학생이 얼굴이 파랗게 상기되어 허겁지겁 달려왔다.
"모두들 가만히 있어요!”
그는 존댓말 어투로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그 멋진 대학생은 한 손으로 우물 모퉁이를 잡고, 밧줄이 달린 우물 바가지를 떨어뜨렸다.
“고칠아! 그거 잡아, 얼른."
고칠이는 울음이 쏟아졌고, 살기 위해서는 그 대학생이 하라는 대로 밧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짜릿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 학생은 고칠이를 구하려고 양팔로 안간힘을 썼다. 숨을 헐떡이는 고칠이는 마치 우물 밑에서 백년 이상 장수한 거북이가 등을 받쳐 올라오는 환상을 보는 듯 했다. 결국 고칠이는 살았다. 그 후 고칠이가 김씨인지, 이씨인지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엄마, 아빠는 그 소식을 듣고선 여러 번의 심호흡으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긴급히 고칠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고칠이가 혹시 문제가 없나 싶어 이리저리 확인하셨다. 다행히 고칠이는 우물 안 벽에 박힌 못에 긁혀 허벅지에 커다란 '느낌표' 모양의 깊은 상처가 남은 것 이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금도 고칠이의 허벅지에 남은 깊숙한 상처를 보게 되면, 웃음부터 나온다.
'저 김고칠이에요. 이고칠이 아닌데, 에라 우물가 가서 친구들하고 놀아야겠다. 장난감이다. 으악, 풍덩 살려줘요 엉엉'
"고칠이는 웃긴 이름에 놀리는 걸 견뎌야 하고, 값비싸 보이는 로봇 장난감이란 유혹을 참았어야 했다고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요. 누구도 못 참았을 뿐 아니라, 그걸 참고 견뎠다면, 아마 아무 생각 없는 바보가 아닐까요? 고칠아! 너를 위해 이렇게 말하는 누군가가 한 명이라도 있겠지, 허허."
고칠씨는 참고 견디라는 말에 어떤 위안도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나도 고칠씨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분야에 잠재적인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하늘을 날고 우주여행도 한다. 그리고 도구를 만들고 사용할 줄 아는 도구적 존재, 유희를 삶에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유희적 존재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고, 사회화 과정을 통해 온전한 인간이 되는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간은 언어 지식 사상 기술 예술 등의 문화를 갖고 있다. 언어 문자 같은 상징체계로 문화를 계승 창조하는 문화적 존재와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이며, 윤리적 행동을 하는 윤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때 고칠씨 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고칠씨는 인간의 특성으로서 도구적 존재 유희적 존재 등을 만족시키지만, 자신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없었다는 면에서는 정신적 존재라고 보기엔 어렵나요?”
고칠씨는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억울한 눈치다.
“고칠이처럼 어린 나이에 그것도 웃긴 듯한 이름에 대한 놀림과 비싼 장난감에 대한 유혹을 쉽게 참아내고 견뎌내라는 것은 너무 과도한 사회적 요구일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고칠씨는 내 말을 듣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감한다는 뜻일 듯싶었다.
“모든지 참고 견디라는 논리는 아마도 기득권을 위한 논리일 듯싶어요. 참고 견딜 수 없는 일들은 말이나 행동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끝내는 당사자 혹은 계층 간의 싸움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것이겠죠.”
나는 말을 덧붙였다.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이를 계발하는 모습이 진정한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의 모습을 억지로 완전히 고쳐 사회가 원하는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 나간다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도 아니고, 참다운 인간의 모습도 아닐 듯싶네요.”
고칠씨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더 큰 만족과 보상을 위해 당장의 욕구 충족을 참았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을 겁니다.”
나는 고칠씨의 말을 거들었다. 그리고 내 입장을 밝혀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는 아니겠지만,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해, 남의 것까지 빼앗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역사적으로도 입증된 사실일 듯싶네요."
이 순간만큼은 고칠씨와 나는 진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