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이는 다시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젠 나이도 들어가고 있어 남 밑에 가서 일하는 건 너무 힘들거니와 받아주지도 않았다.
한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어 보였다. 딜레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사장이 되는 것밖엔 없었다. 누가 그랬던가. 한 가지 선택만이 남았을 때, 그 길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고칠이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게 뭐 없을까 고민했다. 또 다시일간지나 벼룩시장 등 생활광고에 나온 사업거리를 유심히 보면서 하나하나 일거리 계획을 챙겨나갔다.
문득 눈에 띄는 게 보였다. 어린이 도서를 정기적으로 집집마다 운송해서 읽도록 해주는 일이다. ‘K북랜드’에서 지사장을 모집했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자신의 인생에 해가 찬란하게 다시 떠오를 수 있을 듯싶었다.
보증금 500만원이 좀 비싸기는 했지만, 이젠 나도 지점에 우두머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행복했고, 출판 및 교육전문회사 D회사에서 어린이 대상으로 교육사업 파트장까지 지낸 고칠이로선 그리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회사의 지사였지만, 그래도 사장 역할을 할 수 있어 약간이나마 자유로움을 느꼈다. 고칠이는 K북랜드 사장을 만나봤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젊은 사장이었다. 과연 사업경험이 얼마나 있는 건지. 요즘 젊은 사장이 많다고는 하는데,
‘뭐. 한 번 믿어보자.’
그 사장도 고칠이가 아동과 관련한 일을 한 것이 좋아보였는지 흔쾌히 승낙했다.
그는 이제 지사장이 되었다. 그래도 새 사업장의 사장인 셈이다. 직원도 고칠이가 뽑게 되어있는 독립된 지사인 것이다. 브랜드 수수료 등만 본사에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지사장 명함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처음엔 그래도 재미있었다. 아파트 내에 파라솔을 피고 광고도 했고, 학부모님들의 호의도 느꼈다. 크게 머리를 쓰지 않고 발로 뛰어다니니 마음도 편하고 몸도 건강해졌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예전에는 일개 직원이라서 좀 일하면 한 달마다 월급이 나왔는데, 이건 전혀 아닌 거다. 고칠이가 월급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고칠이는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과 직원의 차이가 엄청 난 것이었다.
한 달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허리가 뻐근할 정도로 예전보다 두 세배 가량 일을 했다. 한 달이 지났다. 수입 60만원, 브랜드 수수료 교통비 등 지출 40만원, 20만원이 순수익이었다. 어느새 통장엔 내 용돈도 나가서인지 거의 한 푼도 없었다. 잔고 650원이 고작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들 직장에 가서 일하려고 하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에 가도 고칠이를 받아줄 사람은 없었다. 정말로 선택은 한 가지 밖에는 없었다. 지사장이 아닌 완전히 독립된 회사의 사장이 되는 수밖에 없었던 거다.
순간 고칠이는 ‘K북랜드 사장이 사기 친 것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아니겠지. 나 말고도 다들 지점장이나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데.' 어쩔 수 없이 다음 달에도 이 일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증금도 걸려있고, 한달만에 그 돈을 달라고 하면 계약위반이었다. 그는 지점 내부 수익모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도서대여를 해줄 때 단가가 문제시 되었다. 대여가격 1만원이 2만원정도 되어야 120만원을 벌 수 있었다. 120만원 벌어도 브랜드 수수료 등이 있어서, 고칠이는 100만원도 못 들고 갈 형편이다. 최소 3, 4만원으로 올려야 하는데 엄청난 가격인상으로 학부모님들의 신뢰를 못 받을 게 뻔한 노릇이었다.
“겉으로 쉬워 보였던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했었는지.”
고칠이는 한 일주일을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집에 가서 뭐라고 말할까.' 사장한테 가서 보증금 달라고 하니까, 말도 안 된다.'고 하니, 한마디로 고칠이는 성급했다. 처음 경험으로서는 큰돈이지만 망할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고칠이는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술로 얼굴이 뻘게 진 채 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아빠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냥 문 닫고 들어가셨다. 엄마는 한 번 한숨을 몰아쉬더니, “앞으로 뭘 할 거니?" 라고 대뜸 물어보셨다. 고칠이는 자신도 모르게 툭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그냥 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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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일어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밤새도록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한 대학 교수가 어렵게 쓴 수면제용 '개론서 책'을 읽다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아 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에 깼다. 머리가 좀 아팠다. 어저께 술 먹은 게 개운치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저렇게 시계의 분침과 시침은 사정없이 물 흐르듯 빙글빙글 돌았다. 다 큰애가 자리도 못 잡고 집에서 놀기만 한다고 주변에서 말들이 많아졌다.
그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고칠이는 무조건 방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정말 막막했다. 이뤄 놓은 것도 거의 없어 보였다. 가서 커피나 한 잔 먹어야지 하고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보니, 달랑 200원이 전부였다. 동네 커피 자판기에 가서 커피를 뽑아 먹으려고 가보니, 일반커피는 200원 고급커피는 300원이었다. 일반커피를 마시려고 동전을 넣으려고 했는데, 일반커피는 매진이었다. 엄청난 짜증이 밀려왔다.
“고칠씨는 생존투쟁으로 치닫고 있었네요. 이러다 보면 윤리나 도덕 정신의 가치보다는 물질이나 돈만이 최고라는 가치로 확 바뀌게 됩니다. 맞죠?”
“그땔 기억하고 싶지 않네요.”
“누구나 그런 때가 있긴 한데요, 그 때가 언제냐가 문제일 거예요. 하여간 이를 '가치전도현상'이라고 하지요. 더 나아가 황금만능주의 풍조에 휘말리게 되고, 물신숭배 경향도 나타나죠. 한순간에 사랑보다는 돈이 최고가 되는 거예요. 사실 불평등이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천민자본주의형 체제로 치닫게 되는 거죠. 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시죠?”
“너무 기억이 잘나요. 천민자본주의!”
“이런 시스템에 오래 있으면, 완전히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한 맺힌 귀신이 되는 겁니다.”
“한 맺힌 귀신. 제 심정과 같네요.”
“또한 돈으로 인해 인간소외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면서 돈을 못벌면 완전 폐물취급 당하는 거죠. 자신의 노동, 생산물 등으로부터 소외되는 겁니다. 자신이 만든 생산물 사용가치보다는 돈에 대한 교환가치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소외현상인 거죠. 우리 세대에서 극복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