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칠이는 대학 시절 잠시 사랑이 찾아왔었다. 그 이후로는 사랑이란 말조차도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가끔씩 소개는 들어 왔었는데, 그거마저 이젠 없어진지 오래다.
'자신이 남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그러겠지.' 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동생은 아니라고는 하지만서도.
해가 유난히 밝고 빛났는데, 저 멀리서 먹구름이 진하게 밀려오는 아침이었다.
하늘도 고칠이를 기억하고 있었는가. 마치 20대가 또다시 고칠이 자신에게 찾아 온 것인가. 제2의 사춘기가 오고 있는 것인가. 길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데, 진한 허브향이 나는 한 여인과 살짝 옷깃을 스치는 게 아닌가.
정말 우연처럼 옷깃을 스쳤다. 운명처럼 말이다. 슬쩍 올려본 얼굴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그녀의 얼굴은 백옥처럼 빛났다.
“웃기네요, 고칠씨. 하하.”
고칠이는 그때 자신에게 마땅한 일거리만 있어도 그 여인에게 시간 좀 내서 얘기하자고 말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둔 게 못내 아쉬웠다. 그는 뭐라도 내세울 게 없는 처지라서 그냥 스쳐 지나갔다는 거다. 그러고 나서 그는 며칠씩 실성한 듯 우두커니 그 곳에 머물러 있다가 집에 오곤 했다.
“고칠씨에게 그때 사랑이 찾아 온 것일까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같은 사랑을 에로스라고 불렀어요.
에로스는 간단히 말하면 완전히 육체적이고 성적인 매력에 매료된 사랑이라고 말해요. 그리스도교에서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으로 아가페라고 해요. 인격적 교제, 즉 이웃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필리아라는 말도 있죠. 친구나 동료에 대한 사랑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플라톤의 향연에서 논의하고 있는 단어, '에로스'는 '부족한 것'을 채우거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열망'을 뜻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에로스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 혹은 나에게 중요하거나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런데 그리스 어원에 충실해서 말하면, 에로스는 헌신적인 마음이나 지극히 자애로운 마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지는 않아요.”
“에로스가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의미가 있었네요?”
“네, 맞아요. 그리스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이타적인 정도에 따라 아가페, 에로스, 필리아로 구분하여 사용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힌두교에서 카마, 유교에서 인, 불교에서는 자비 등이라고 표현했고, 사회적으로는 더 나아가 우애 애국심 등으로 표현됩니다.”
하지만 그 허브 향 나는 여인은 더 이상 고칠이 눈엔 띄지 않았다. 고칠이는 뜻대로 되는 게 없는 나머지 앞에 놓인 찌그러진 커피 캔을 뻥 차버렸다. 그는 습기 찬 어둠속의 긴 터널을 지나가는 듯 했다.
“내 주제에 무슨 여자냐.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
그는 스스로 책망하기 바빴다.
그런데 운명의 여신이 그를 버리지 않았는지, 그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우연히 그 여인을 다른 곳도 아니고 찜질방에서 마주쳤다. 그곳에서 본 그 여인은 길에서 봤을 때보다 더 자태가 수려했다. 게다가 얼굴도 선해 보였다.
"큭큭."
완전 고칠이의 이상형인 거다.
그 여인에게 말을 걸려고 용기를 냈다. 그가 가까이 가서 말 걸려는 순간, 그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먼저 그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저 다영이 엄마예요."
그 여인 뒤쪽으로 고칠이가 교사시절 자신이 가르쳤던 다영이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정도 됐을 거다. 그 학생이 너무 예뻐서 다영이의 어머니가 어떤 분일까 궁금했던 날이 있었는데, 마침 다영이 엄마가 직장에서 일찍 끝난 날 서로 인사했었다.
그때 고칠이는 다영이랑 엄마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었다는 거다. 다영이 엄마는 한두 달 전인가 직장일로 바삐 서둘러 길을 가고 있었을 때, 우연히 고칠이 선생님을 보고 인사하려고 했다네. 그런데 일이 너무 바빠서 그냥 지나치고 말아 지금까지 죄송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는 거다.
“다영이 엄마요? 아, 맞다! 그 예쁜 다영이의 엄마. 으악! 내 기억력이 문제야. 그걸 왜 난 기억 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