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작품을 보다 보면,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의 모습이 종종 나오곤 한다. 그런 장면은 일반적인 가정폭력의 모습으로 자리잡아 있는 것 같다. 가정 폭력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육체적 고통과 공포 때문일까.
오랜 시간 동안 내면에 쌓인 정신적인 억압과 분노, 부모에 대한 부채감과 죄책감,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 웹툰 <땅 보고 걷는 아이>는 가족이란 관계가 만들어 낸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겨울이
주인공 한겨울은 어릴 적 아빠와 엄마가 서로에게 폭언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다. 어두운 방에 웅크려 부부의 고성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마음은 늘 불안하다. 바람 나서 떠난 아빠와 공장으로 출근하는 엄마. 고단한 하루를 보내며 자식 탓을 하는 엄마의 모습을 전부 지켜본 겨울이는고작 500원을 쓰는 일에도 죄책감으로 날밤을 지새워야 한다.
죄책감에 짓눌리는 겨울이
엄마를 비롯한 모두가 겨울이에게 말한다.
“너를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해."
"남편이 바람피운 너희 엄마가 얼마나 힘들겠니."
"너희를 책임지고 키우는 엄마가 얼마나 고생이니."
"그러니 네가 이해해야 해.”
엄마가 세상의 전부인 겨울이는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고 있는 불쌍하고 고마운 엄마"에게 무거운 부채감을 느끼며, 참고 이해하는 것만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거둬준 것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겨울이는 나가 죽으라는 엄마와 조부모의 악담도 꾹꾹 참아낸다.
그렇게 가장 사랑받을 나이인 겨울이의 10대는 자존감을 짓뭉개는 폭언으로 새까맣게 얼룩져버린다. 온종일 학교에서 멀쩡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던 평범한 겨울이는 집에만 들어오면 세상에 둘도 없이 싸가지 없는 나쁜 년이 된다. 가족들은 어떤 논리도 없이 겨울이의 인성에 프레임을 씌우고, 겨울이를 짓밟는다. 엄마의 희생때문에 모든 폭력과 폭언을 참아내던 겨울이는 매일 밤 고통 없는 죽음을 상상할 만큼 정신적으로 내몰리고 만다.
구체적으로 죽음을 상상하는 겨울이
계속 삼키다 보니 점점 내 안에 악마가 자라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겨울이의 마음속에는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쌓여간다. 까맣게 타들어 간 분노는 차츰차츰 겨울이를 좀먹어 매사 부정적이고 화가 많은 인간으로 바꾸어버린다. 악바리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두렵고, 자신을 이렇게까지 내몬 가족이 원망스럽지만, 겨울이를 이해하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그 집에서 겨울이는 혼자만 유별나게 구는 병신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화내실 때 빼고는 다정하게 말하신다. 엄마가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괜찮은 순간이 있으니까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걸까?
<땅 보고 걷는 아이>는 가정 폭력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수세에 몰린 아이의 심리를 정말 잘 표현한 작품이다. 작가가 자신의 "분노"를 계기로 <땅 보고 걷는 아이>를 만들었다고 밝혔듯, 이 작품은 겨울이의 관점에서 가정 폭력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정 폭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겨울이는 자신이 정말 힘든 게 맞는지, 힘들어도 되는지 혼란스러워 한다. 가족 중 누구도 겨울이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겨울이가 부당한 고통을 깨달아가는 20년의 세월 동안 혼자 고통을 씹어 삼키며 느끼는 감정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족을 마음대로 원망할 수 없는 겨울이
가정 폭력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그중 "가족"이라는 관계를 꼽고 싶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오래도록 쌓인정과 미련 때문에, 어린 자식들은 부모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부모가 매번 고통만 안겨줄 뿐이라면, 그래서 마음껏 미워할 수 있다면 겨울이는 조금 덜 고통받았을지도 모른다. 평생을 함께해 온 부모는 자신에게 사랑을 보여줄 때도 있었고, 다정할 때도 있었다. 늘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 하나뿐인 나의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이들은 오랜 폭력 속에서도 언젠가는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또 배신당한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희생한다는 부모의 말은 정말 강력하다.부모의 힘겹고 나약한 모습은 계속 자식의 눈에 밟히며 무의식 중에 산처럼 쌓여있는 부채감을 꾹꾹 상기시킨다. 아이들은 부모의 폭력에 그들을 죽도록 미워하다가도, 이내 그런 스스로에게 죄책감과 혐오감을 느낀다. 부모를 향한 증오는 그대로 죄책감으로 돌아와 자신의 숨을 옥죄는 것이다. 그래서 오갈 곳 없는 분노를 품은 아이들은 스스로 가족이라는 관계를 끊어낼 능력이 없다. 자식들은 그 족쇄 같은 관계를 유지해도 상처받지만, 끊어내도 상처받기 때문이다.
겨울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인들
그리고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어서 외롭다. 백 번, 천 번을 설명해도 "집"이라는 공간에서 몇 년에 걸쳐 쌓인 당사자의 뒤엉킨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뻥 뚫린 가슴을 삭이며홀로 베갯잇을 적시던 수많은 밤도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순간들이다.오직 나만이 감내해야 하는 나의 고통. 타인이 타인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아마 아이들은 몇 번의 고배를 맛봐야 한다. 슬프게도 가정 폭력의 상처는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주변에서의 단발적인 위로와 관심으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주 단단해져야 한다.
홀로서기까지 마음가짐
겨울이는 어른이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가족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며 독립한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겨울이"의 과거는 만화처럼 한순간에 정리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곪은 상처들과 엄마를 저버렸다는 자괴감이 겨울이의 뒤에 길게 드리워질 수도 있다. 마지막 화의 베스트 댓글처럼 겨울이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한동안 고독한 일상을 보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