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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Nov 02. 2017

그러니까 한번 더, 이쇼라스

나빌레라 (글 HUN, 그림 지민, 다음웹툰, 2016-2017)





우리는 꿈을 생각할 때, 어린아이나 젊은이를 상상하곤 한다. 젊은이의 꿈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에 비해, 노인과 꿈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한다. 삶을 정리하고 돌아봐야 할 나이에 미래를 그리는 꿈은 흔히 욕심으로, 가족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HUN 작가와 지민 작가가 함께 쓰고 그린 웹툰 <나빌레라>는 우리가 잊고 사는 노인의 꿈을 통해 가족과 삶을 그리고 있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산 뒤 은퇴한, 일흔을 앞둔 심덕출씨는 고물을 수집하며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고 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며 자식농사도 훌륭하게 마치고서 편하게 살 날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중, 덕출씨는 가족들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아내가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에 가족들 앞에서 발레를 하고싶다고 말한 것이다. 10살 때 철도 사업을 하려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에서 처음 만난 발레를 평생동안 그리워하다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가족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낯뜨겁게 ‘그런’ 옷을 입고, 동네 소문 안좋아진다며 말리는 가족들에게 덕출씨는 이렇게 말한다.

“가슴에 품고 살던거 하나 해보는게 그렇게 안될 일이냐...?”
발레복을 입은 덕출씨. 가족들이 경악하고 있다.


하지만, 노인의 꿈은 쉽게 무시당하고 만다. 남들 다 하는 게이트볼이나 당구, 정 몸을 움직이고 싶으면 등산이나 에어로빅을 권하는 가족들 앞에서, 한평생 자식과 가족을 위해 살아온 덕출씨는 끊었던 담배를 입에 물기도 한다. 하지만 덕출씨는 무작정 발레 교습소로 향한다. 본인이 배우고 싶다는 말에 다칠까봐 걱정된다는 답을 듣자 말 그대로 구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누구보다 빨리 나와 청소하고, 비품을 채우고, 거미줄을 치우는 덕출씨를 보며 단장은 슬럼프를 겪고 있던 채록을 선생으로 붙인다. 채록은 덕출씨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덕출은 채록의 스케줄과 운동량을 관리하는 매니저를 맡는 방법으로 서로에게 윈윈이 되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덕출씨는 채록을 집요하게(?) 관리한다. 수첩에 어디서 무얼 했는지를 꼼꼼하게 기록한다. 지독한 기록벽인 줄 알았던 이 버릇은, 알고 보니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앓고 있는 덕출씨가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의사에게 조언받은 방법이었다. 아무리 해도 채록처럼은 할 수 없는 덕출씨, 그리고 그런 덕출씨가 부담스럽고 미련해 보이는 채록은 티격태격 다툰다. 그러던 중, 우연히 덕출의 병을 알게 된 채록은 비로소 진지하게 덕출을 대하게 된다.

알츠하이머는 자신을 잃어가는 병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늦출수는 있을지언정 치료할수는 없다. 어쩌면 끝이 정해져 있는 싸움을 하고 있는 덕출씨는, 가족들에게 병이 심해져 위험한 때가 되어서야 가족에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자신을 잃어가는 병을 숨길 수 있을리 만무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가족들 또한 덕출씨의 병을 알고서야 아버지의 소원인 발레를 응원하게 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더이상 자신을 되찾을 수 없고, 가족이 기억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인정받을 수 있는 꿈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발레단은 공연에 덕출씨와 채록의 2인무를 포함시키고, 마지막까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알츠하이머가 갑작스럽게 진행되며 덕출씨는 공연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리고 채록은, 그런 덕출씨에게 말한다.

“할아버지가 지금... 날 기억하잖아요.”
2인무를 준비하는 채록과 덕출. 비장한 채록에 비해 덕출은 근심이 가득하다.


결국 무대에 오른 채록과 덕출의 2인무는 <나빌레라>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연출로 표현된다. 웹툰의 스크롤 연출은 페이지 만화에 비해 더 큰 운동성을 부여한다는 분석이 많다. 선형으로 이루어지는 발레는 이 운동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르중 하나다. 마치 물수제비를 하듯 가볍게 표현되는 2인무는 교차하고, 흩어졌다가 모이며 둘의 몸이 만들어내는 선을 한껏 뽐낸다. 70이 다 된 할아버지와 20대 청년의 신체가 같을리 만무하지만, 이쇼라스(러시아어로 ‘한번 더’. 작품의 자문을 맡은 이원국 단장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를 외치며 흘린 땀방울은 배신하지 않았다. 덕출씨의 몸이 기억하는 움직임은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하다.

이 웹툰을 다 보고 나면, 옆에 쌓여있는 휴지뭉치를 보고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치매를 앓는 노인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어쩌면 흔한 소재를 통해 작가는 가족이 이별을 준비하는 장면, 그리고 한순간 한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장면을 그린다. 언제나 곁에 있을거라고 생각하기에 소홀하게 되는 가족이라는 클리셰는 이제 평범한 연출로는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눈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발버둥치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덕출씨의 모습은 아름답고, 그렇기에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고 놓쳐버리는 가족의 꿈, 그리고 노인의 꿈을 통해 작가는 현재에 충실하자고 말하고 있다. 흔한 신파일 수 있는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관계에 얽매이기보다 서로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와 서로를 존중하는 품격에서 나온다. 어쩌면 야만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작품이 바로 <나빌레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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