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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Nov 08. 2017

내가 그랬잖아, "너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그래도 되는가(家)> (우다, 다음웹툰, 2015-2016)

평화는 권력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지 않는 자세에서부터 시작한다.




    전통적 의미에서 가족이란 나와 DNA를 공유하는 씨족을 말한다. 흔히 사회를 집에, 가족을 벽돌에 비유하곤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회의 위기가 가까웠다며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를 외쳤다. 핵가족이라는 말이 등장해 사회현상으로 소개된지도 수십년이 지났다. 1인가정이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떠오르지만, 우리는 여전히 명절이면 고통받을 것을 알면서도 고향집을 찾는다. 우리는 이걸 천륜(天倫)이라고 부른다. 천륜은 부모와 형제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일컫는 말이다. 우다 작가의 웹툰 <그래도 되는가(家)>는 과연 천륜이라는 말로 이루어지는 억압과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 가족의 붕괴


    작품은 진목최씨 대기공파 문중의 토지를 관리하던 할아버지, 양반집의 딸인 할머니, 강남 유명 성형외과 원장인 큰아버지, 지역 유지인 홍씨 가문의 딸인 큰엄마, 공사 출신 파일럿인 아빠와 20년차 초등학교 교사인 엄마, 그리고 성실한 모범생인 동생 최희성, 교사지만 군복무중인 오빠 최민성, 그리고 명문대에 재학중인 주인공 최은성이 등장한다. 이렇게 길게 등장인물을 설명한 것은 다름아니라, 그들이 가진 지위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이상적인 "유복한 가정"이다. 마치 유복한 가정이라는 말이 진목최씨 대기공파 문중을 위해 만들어진게 아닐까 싶다.

할머니의 말에 은성(좌)은 '말씀'이라고 말하지만, 동생인 희성은 반말로 답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바로 천륜,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로 묶인 이들은 DNA가 내려오는 대로, 먼저 받은 순서대로 위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것을 거스르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염색체다. XX염색체는 XY염색체에 서열에서 밀린다. 세대 순, 성별 순, 나이 순으로 위계가 매겨진 집안은 절대 권력자, DNA서열의 최상위 남성인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점으로 분열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최은성은 참을 인(忍)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즉시 '유복한 가정'의 구성원들을 위태롭게 연결하고 있던 고리를 끊어버린다. 결국 그 이후 완벽한 가족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주인공 최은성은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아껴주던 할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없이 음식과 술을 나른다.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고, 그것을 참아내고 잠을 설쳐가며 손님을 맞는 것은 여성이다. 그에 비해 남성들은 처음 보는 망자 본인의 친족에게 성희롱을 하고, 술을 마시며 고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여기서 나아가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앞서 말한대로, 성별에 의한 위계라는 변수 때문에 집안 최고 어른은 할머니가 아니라 성형외과 원장인 최은성의 큰아버지가 된다. 그리고,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사업을 밀어주기 위해 은성의 아버지에게 유산 포기를 종용한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했던 가족은 그 폐쇄성 만큼이나 확실한 위계질서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짓누르고, 그 압력으로 인해 붕괴하기 시작한다.


* 평화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주인공 은성은 균열이 가기 시작한 집안에서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부모님들에게 진력이 난다. 그래서 다가오는 추석, 풀메이크업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은성이 한마디 하기 무섭게, 부모님은 "그런 말 하려고 무섭게 차려입고 화장했느냐"고 묻는다.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울 집안을 왜 들쑤시고 다니냐는 말이다. 부모님의 말은 <그래도 되는가>의 단골 대사이기도 하다. '너만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운데 왜 나서느냐'는 물음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평화는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평화는 가만히 있는 현상의 유지가 아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선 평화를 원하는 당사자들간에 대화와 협상이 오고 가야 한다. 긴장의 평형이 평화지, 일방적으로 내리누르는 고요함은 평화가 아닌 억압이다. 갈등의 부재가 평화라면, 그건 갈등을 통해 잃을 것만이 있는 사람이 느끼는 염증에 가깝다. 그래서 가부장제는 갈등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갈등을 옳지 않은 것으로 포장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제기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문제제기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한 신호다. 때문에 평화는 권력의 차이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문제제기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지 않는 자세에서부터 시작한다.


    평화는 누군가의 인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았을 때 비로소 온다. 그러나 은성의 가족은 수차례에 걸친 은성의 문제제기를 '감히'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때문에 반복되는 "너만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말은, 말하는 사람이 상대의 행동을 가려 받을 수 있다는 권위의 표현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 뒤에는 자식이니까, 동생이니까, 딸자식이니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숨어있다. 집안의 남성들은 당사자가 아닌데다 가해자의 입장이기에 입을 다물었고, 집안의 여성들은 가장 앞서 나섰던 은성이 꺾이자 입을 다물게 된다. 그리고, 은성은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은성은 알고 있다. 무엇이 자신을 억압하는지.


    바깥에서 보면 미친 행동이다. 그러나 웹툰을 보면서 독자들은 은성의 심리상태를 따라가게 된다. 앞서 가족을 설명할 때 이상한 점을 찾았다면, 은성의 폭발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모세대의 여성들은 주로 "누구의 딸"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은성의 어머니에 와서야 자신이 가진 정체성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은성의 할머니와 큰어머니는 적극적으로 남성의 권력에 편승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언뜻 악역으로 그려지는 이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이들또한 덜 고통받기 위해서 택한 삶이기 때문이다.


    은성은 맞서 싸우고, 마침내 결과를 얻어낸다. "개같은 가부장제"를 부숴내진 못했지만, 자신의 숨 쉴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평화는 그제서야 찾아왔다. 우리는 더이상 평화를 '가만히 있으면'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목소리를 낼 때, 그것을 균열을 내는 행동으로 규정하고 억압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되는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들에게 처음의 목표의식을 잃지 않고 한달음에 내달린다.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을 '사이다'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어딘가 뒷맛이 씁쓸한 건, 작품 밖 세상은 그대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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