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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Jan 13. 2018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다

<며느라기> 수신지, 2017-2018.

    <며느라기>는 2017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에서 문체부 장관상과 만화가협회장상을 동시에 수상한 작품이다. 만화계에 중요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그동안 SNS에 정기적/비정기적으로 연재했던 만화들은 많았지만, 이 웹툰만큼의 파급력을 가진 작품은 드물었다. 뿐만 아니다. 대부분 SNS에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은 플랫폼의 러브콜을 받고 정식 작품으로 데뷔했다. SNS는 데뷔의 등용문이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깨고, 작가가 스스로 작품 판매 팝업샵 '민사린닷컴'을 열어 작품을 주문생산 방식으로 단행본과 상품을 판다. 여태까지 없었던 시도다. 윤태호 만화가협회장은 심사평에서 "웹툰이 플랫폼을 벗어난 형태로도 연재가 가능하다는걸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다.

<며느라기> 단행본 및 굿즈를 판매하는 주문생산방식의 팝업스토어

    하지만 <며느라기>는 SNS라는 환경을 잘 이용해 성공한 작품이라는 단편적 평가를 남기기엔 아쉬운 작품이다. 물론 SNS라는 틀을 통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나와 친구를 맺은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을 보면서 독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주인공 민사린이 겪는 이야기들이 독자 본인이 겪었거나, 보았거나, 최소한 들어본 이야기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 웹툰은 연재 초기 '민사린이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라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았다. 블로그에 연재하다가 시누이에게 들켜 SNS에 연재를 하게 되었다는 식의 소문도 돌았다. 이 작품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며느라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미디어에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며느라기의 사례들을 보고 듣게 될 뿐 아니라, 실제로 겪기도 한다.

9_6 설날 에피소드 中. 30대인 민사린이 어린 시절 TV에서 보던 모습이 그대로 자신의 집에 재현되고 있다.

    이 웹툰은 주인공 민사린과 무구영이 결혼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신혼여행이 끝나고 난 뒤, 민사린은 무구영과 마찬가지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민사린에게 다가온 것은 무구영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의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라는 은근한 압박이었다. 민사린은 '점수 좀 따겠지?'라며 기꺼이 생일상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날 아침, 민사린은 이상한 경험을 한다. 임신한 '형님' (이 호칭이 구린 건 차치하고)에게 쏟아지는 애 낳을때 자신의 아들(그러니까 '형님'의 남편) 고생시키지 말라는 둥, 남편 회사 일에 애낳는다고 지장 주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

3_3. (드디어) 생신파티 中. 민사린의 '형님'은 이 한마디로 상황을 일축한다.

    '형님'은 자신의 일은 자신들이 의논해서 결정하겠다고 잔소리를 일축한다. 화를 내지도, 격앙된 반응도 아니었다. 그리고 민사린은 무구영에게 형님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이에 무구영은 "형님은 자기 인생 사는 사람이다. 엄마도 포기했다"고 답한다. 민사린은 창밖을 내다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인지 너머에 있던 '미스터리'가 인식의 지평에 들어와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사는 (나쁜, 버릇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게 된다(도대체 왜?)는 점이다.


    민사린은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 없지만, 동시에 '형님'처럼 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무구영 또한 나쁜 사람이 아니라 문제인식을 못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무구영은 민사린과 싸운 후 장모의 치킨집에 가서 회식을 한다거나, 일손을 돕는다거나 하는 염치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사린이 가진 문제의식이 적당히 서로 잘하는 수준에서 해결되지 못할거라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때문에, 무구영은 민사린에게 "명절 정도만 참아주면 안되냐"고 묻는다.


    웹툰 <며느라기>가 가진 문제의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간 미디어에서 남편들에게 일손을 거드는 정도는 할 것을 요구하던 막연하고 시혜적인 시선을 비판한다. 부부관계는 쌍방에 책임과 의무를 부과하는 관계다. 하지만 민사린과 무구영의 관계를 지켜보는 독자들은 민사린에게, 나아가 여성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책임이 부과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 전까지 남성들에게 '일을 도와주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어떻게 부모님한테 그러냐'고 말하는 것은 갈등을 억압하고 통제함으로써 평화를 가져오는 지배자의 수단이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어느 한쪽이 지배하는 관계여선 평화가 지켜질리 없다.


    이 웹툰에서 작가는 무구영의 모습을 통해 남성들이 시혜적인 시선을 거두고, 남성들은 중재자가 아니며 명백한 '며느라기'의 가해자이자 수혜자로서 부조리를 인식하고 싸우기를 요구한다. 시월드나 며느라기로 통칭되는 시기가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면, 거기서 며느리이자 당신 인생의 동반자인 사람에게 인내와 책임을 떠넘긴 채 참으라거나, 무구영처럼 '명절 정도만'이라고 부탁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누구 하나 행복하지 않은 명절과 제사, 바꿔야 한다는건 누구나 알고 있다.

    <며느라기>는 최종장 'No. Thank you'를 통해 이 웹툰을 보고 있는 익명의 당신들에게 묻는다. "며느라기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리고 민사린은 답한다. "아니오." 만약 며느라기의 민사린이 그저 '며느리인 주인공'이었다면 나올 수 없는 답변이다. 이 웹툰에서 민사린은 '주인공인 며느리'로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답을 찾고, 질문을 던진 다음 스스로 답을 내린다. 민사린은 이제 평화가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갈등 해결 이후의 상태가 평화라는 점을 깨달았다.

며느라기의 마지막 컷. 구겨진 "며느라기"

    "자기 인생이나 사는 애" 취급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던 민사린은 이제 없다. 아마 민사린은 싸워나갈 것이고, 또 무구영에게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며느라기는 우리가 모두 인지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해법이나 확실한 해답을 제시하는 작품이 아니다. 민사린과 무구영의 삶을 통해 작은 변화를 일으키는 법을 SNS라는 창을 통해 체험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SNS를 통해 타인의 삶을 염탐한다. 그리고, 그곳에 민사린이 살고 있었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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