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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Jan 23. 2018

중립의 아수라장 속에서

균형과 중립은 다른 말입니다. 다른 말.

    만화판에 기웃거린지도 벌써 5년차가 되었다. 통역과 번역을 공부하던 학생이던 내가, 번역가로 먹고살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작품을 재미있게 보는걸로 족하던 독자에서, 이제는 작품 평을 쓰고 원고료를 받는 평론가가 되기도 했다. 지난 5년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웹툰을 읽기 시작한건 15년 전, 웹툰이 막 시작하던 시기였다. 닥치는대로 웹툰을 읽었다. 무료한 일상에 웹툰을 보는 시간은 큰 즐거움이었다. 군대에 다녀오니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시대가 열렸고, 어학연수를 다녀오니 웹툰은 모두가 즐기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보기에 좋은 작품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을 소개하려고 웹투니스타를 시작했다. 그것도 벌써 5년이 됐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만화계 소식들을 전하기도 했고, 덕분에 만화가협회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서론이 이렇게 길었던 이유는, 웹툰 독자로서 자격을 따지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정도면, 독자의 자격을 논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웹투니스타를 시작하던 2013년 여름을 기억한다. 당시 네이버, 다음에 연재되는 작품을 모두 합쳐도 300개가 되지 않았다. 280여 작품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연재되던 작품을 모두 봤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웹투니스타를 시작하던 시기, 레진코믹스가 등장했다. 유료로 웹툰을 팔겠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1-2년새 네이버를 필두로, 세계무대 진출을 노리는 플랫폼들이 등장했다. 한류 열풍을 타고 웹툰도 대박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황금빛 미래를 꿈꾸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2016년이 왔다. 독자의 자격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아수라장을 기억한다.


    흔히 '티셔츠 사태'로 불리는 2016년 8월 당시, 자칭 '독자'들은, 작가들에게 사상검증을 하고 나섰다. 질문도 다양했다. "메갈리아에 찬성하느냐"부터, "페미니스트냐"까지. 당시에 제보받은 기록들에는 굉장히 다양한 형태의 사이버불링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작가들의 메시지가 있었다. 작가들은 방어수단 없이 무차별적 공격을 받았고, 이 공격의 대상이 된 작가들을 '살생부'로 만들어 공유했다. 이 중에는 동명이인의 다른 작가에게 공격이 가해진 경우도 있었다. 인신공격과 협박이 난무하는 와중, 플랫폼들의 반응도 있었다. 모 플랫폼의 전직 대표는 "반인륜적 단체"와 함께할 수 없고, 자신의 직원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레진코믹스는 작가들에게 '개인적인 SNS활동을 자제해달라'며, '사업영역에 피해를 줄 경우 피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레진은 현재 이때의 행동을 '중립적인 처사'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뿐 아니라 만화 칼럼니스트 서찬휘씨의 경우 가족들에게도 인신공격과 욕설이 쏟아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독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웹투니스타에서도 이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고, 레진코믹스 사태가 터졌다. <레진코믹스 연대기>에서부터 웹소설 졸속종료블랙리스트등의 당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2017년 말부터 2018년 1월, '작가들이 독자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작가들 편에 설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자칭 '예스컷, 노실드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국가의 검열에 반발하던 독자들은 없다며 검열을 용인하겠다는 입장에서 시작한 이 자칭 운동은 이제 플랫폼에 의한 작가착취에도 찬성하는, 일관된 파시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흔히 '중립'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말한 "자칭 독자"중 하나는 나무위키 토론장에서 위근우 기자와 웹투니스타를 동일 선상에 놓고 (매우 부끄러웠다.) "위근우나 웹투니스타의 경우 저번 메갈리아 사태 당시 작가측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독자측을 일방적으로 조롱한, 중립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자들입니다. 격조? 그런건 둘째치고 중립성에 심각히 위반되는 그런 자들의 반응을 근거랍시고 쓰겠다고 하면 안되죠." 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작가측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게 왜 문제인지, 그리고 내가 한 말이 조롱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토론에서 근거를 댔는데 중립이 아니니 근거가 무력하다고 주장하는건 어디서 나오는 말인지 모르겠다. 토론장에서 중립의무를 가질 이유가 없거니와, 토론은 원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합의점을 찾기 위해 맞붙는 논쟁의 장이다. 상대방이 가져온 근거에 대한 반박이 '중립이 아니다'라면, 그들은 아주 중립적인 데이터(그런 것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에 의존해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는 매출을 통해 알아보자. "자칭 독자"들은 앞서 티셔츠 사태에 대한 레진의 반응이 작가를 지켜주었다는 입장도 동시에 취하고 있다. 때문에 레진코믹스 불매운동에 나서겠다고 했으나, 2016년 레진코믹스는 흑자로 전환하는데 성공했고, 매출상의 타격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2017년 12월 매출에 대해서 레진코믹스는 "헤비 독자들의 이탈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안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매출이 줄어든 것이 체감된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2016년 매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 사람들과, 현재 레진 사태에 매출에 영향을 주는 사람들. 독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수치상으로 나타난 독자들은 누구의 편에서 작품을 구매했는가?


    이때, 궁지에 몰린 그들이 등장시킨 개념이 '잠재적 독자'라는 말이다. 잠재적 독자를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면서 작가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이다. 컨텐츠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이건 차치하도록 하자. 중요한 것들이 차순위로 밀려나는 것은 설명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모든 자연인이 잠재적 독자라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컨텐츠가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런 것은 없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모두 각기 다른 기준으로 컨텐츠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타겟 독자라는 말이 있고, 킬러 컨텐츠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취향에 따라 작품을 고르고, 소비하고 평가한다. 


    때문에 컨텐츠를 소비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는것이 중요하다. 2013년 당시 '별처럼 많은 웹툰'이라는 카피로 웹투니스타를 만들었을 때, 양대포털의 작품수가 300여 작품이라고 말했었다. 그걸 골라주기 위해서 웹투니스타를 만들었고, 지금은 레진에만 300여 작품이 걸려있다. 전체 연재작은 대략 5천작품에 달한다. 더 많은 관점과 더 많은 리뷰가 필요하다. 웹투니스타와 기준이 다른 컨텐츠 소비방식을 가진 분들이라면, 독자적인 리뷰 플랫폼을 만들고 함께 소비하면 된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나만이 중립'이라는 태도나 마찬가지다. 마치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것 처럼 포장하지만, 객관적인 시선은 의견을 내는 순간 주관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대로, 우리는 각자의 기준으로 컨텐츠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립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익명의 독자들이 작가들을 공격하는 상황, 그리고 플랫폼이 작가를 착취한 상황에서 만화 독자로서 가장 중요한건, 만화가들이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에 있다. 독자가 작품을 읽지 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양쪽의 의견이 마치 대등한 것 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중립적일지는 몰라도 균형적이진 않다. 대부분의 사항에서 중요한 건 중립보다 균형이다. 중립은 공무원이 지켜야 할 태도지, 사인들이 지킬 태도는 아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균형이 더 중요하다. 이럴때 중립을 절대가치로 상정하는 것은 '무책임한 방관'에 가깝다. 무책임한 방관적 태도를 가지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거기서 입을 열어 '중립' 운운하는 순간의 태도는 "책임은 지지 않고 싶지만 발언권은 갖고 싶다"는 비겁함이 된다. 입을 열 권리를 원한다면, 최소한 책임져야 할 의무는 다하고 와야 한다. 잠재적 독자 운운하기 전에, 작품을 읽으라는 말이다. 작가의 행실 때문에 작품을 보이콧하겠다면 그렇게 하라. 다만, 그 와중에 플랫폼이 작가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작가착취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겠지만, 거기에 대해 발언권을 갖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전혀 상관없는 사항을 마치 깊은 연관이 있는 것 처럼 꾸미는 것은 비겁하다. 예스컷과 노실드 '운동'이 저열한 이유는,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반박하고 논쟁하기보다 다른 권위, 즉 집단의 권위를 빌려온다는데 있다.


    독자아닌 독자들의 조롱은 20여년 전 청보법 사태에도, 그 이후 대본소 시장 붕괴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끝으로 덧붙이자면, 한겨레의 레진코믹스 사태 총정리 기사에 레진을 옹호하고 작가들을 비난하던 사람과 불법 만화 공유사이트에서 만화를 보았다는 게시글을 올린 블로그의 아이디와 같은 이메일을 사용하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MG계약은 물론 작가의 SNS를 사찰해 프로모션에서 배제하는 등 불이익을 주고, 자신들이 유통하는 만화에 대한 이해도는 전무한데 코인수익은 7:3으로 가져가는것은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직 유효한, 심지어 지체상금이 있는 업종에서도 비상식적인 액수의 지체상금을 갈취하고도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는 커녕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나오는 업체의 편을 드는 사람들을 나는 같은 독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물며 그 기준이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드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21세기 스마트폰 시대에 모두가 손끝으로 접속할 수 있는 스마트폰내 플랫폼을 가진 사업자는 새롭게 등장한 갑이다. 자리 펴고 앉아 수수료를 떼는 장사가 가장 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다른 이들의 갑질에는 분노하면서, 그 최상단에 위치한 존재들의 갑질에는 '어쩔 수 없는 것', '작가들이 자초한 것'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저열하고 비겁하다. 당신들에게 반성과 회심을 요구하지는 않겠다. 당신들의 입을 막지도 않겠다. 다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매도하지 말라. 동시에, 레진코믹스의 사과를 통해 문제해결의 첫 발을 빠른 시일내에 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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