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핀 동백꽃, 죽쩡, 웹툰리그 및 베스트도전, 2017-연재중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사람은 때론 변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쩡 작가가 웹툰리그와 베스트도전에 연재중인 <하늘에 핀 동백꽃>은 격렬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변화의 시기를 겪는 주인공들을 그린 작품이다. '관리자'가 지키는 가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고등학생들의 시선으로 현실세계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를 날카롭고 예리하게 재단해 적나라하게, 그러나 섬세하게 전하는 작품이다.
작품의 초반은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보통의 한국 드라마였다면 남주인공이 마음을 얻기 위해 갖은 폭력을 저지르고, 그걸 로맨스로 포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 <동백꽃을 든 여인>, 즉 <춘희>에서 따온 '춘희'. '설화'는 남자 주인공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남자'다. 여기서 보통 남자의 뉘앙스가 이 작품 초반부의 핵심이다. 설화는 여성은 자신이 쟁취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나 누나가 밥을 차려주지 않으면 라면밖에 할 줄 모르는 남자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보통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박력과 폭력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보통 남자'다.
반면, 춘희는 머리에 항상 빨간 동백꽃을 꽂고 다니고, 성차별적 발언을 참고 넘어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다. 한마디로 '보통이 아닌' 여성으로 그려진다. 취미도 '남들'이 보기엔 보통이 아니다. 겉보기에는 활기차고 평범한 아이처럼 그려지지만, 춘희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기력하다. 때문에 세상에 많이 지친 상태다. 차별과 혐오는 일상에 만연하고,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한두번 벽에 부딫히다 보면 계속 도전하게 되지만, 가장 가까운 곳의 폭력도 어찌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하고 나면 깊은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
춘희와 설화의 로맨스만을 그린 작품이라면, 이 작품은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을 납작하게 그린 작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세계에 만연한 여성혐오는 물론 소수자 차별과 혐오를 날카롭게 끄집어내 훌륭한 이야기, 즉 <하늘에 핀 동백꽃>으로 재단해냈다. 작품 내에는 기본적으로 깔린 여성혐오와 청소년 혐오를 비롯해 가정폭력, 동성애 혐오등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다양한 폭력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춘희라는 주인공이 세상을 바꾼다거나, 만연한 차별과 혐오가 한번에 사라진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관리자'라는 존재는 무언가 하려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한 것 처럼 보인다. 춘희와 설화를 이용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 처럼 그려지긴 하지만, 인간에 비하면 전지전능한 그들의 존재도 그리 크지는 않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중에 등장하는 것처럼 '사랑은 쉽게 변하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춘희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설화는 춘희에게 변함없는 관심을 보이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간상으론 고작해야 반년밖에 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변화를 포기한 춘희는 아주 조심스럽게 설화와 거리를 두고, 설화는 거침없이 그 거리를 좁히려고 한다. 초반부의 설화를 보면 아주 무례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혼자서 이미 결혼까지 상상해버린 다음, 다짜고짜 공개된 장소에서 고백하는 모습. 그러나, 설화가 춘희가 겪었던 보통의 남성들과 딱 한가지 달랐던게 있다면 반성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이 변화의 가능성 덕분에, 춘희는 설화에게 조금씩 거리를 좁히도록 허락한다. 설화는 그 박자에 맞춰 천천히, 춘희의 의견을 물어가며 접근하게 된다. 설화가 보아왔던 보통의 로맨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방식이다. 설화는 '손목을 잡고 벽으로 몰아세운 다음 키스하는' 드라마들을 보고 사랑을 배웠다고 나오지만, 사실 그런 사랑은 있어선 안된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되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것을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은 분명 개인의 책임이다.
이 작품이 긴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그려내는 폭력의 중심에는 가정폭력이 있다. 여성 위주의 커뮤니티에서 '결혼 전의 부모님을 만나면 하고싶은 말'에 대해 '안 태어나도 좋으니, 아빠와 결혼하지 말라'는 답이 많이 달렸던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남성위주의 커뮤니티에서는 대답이 달랐다. 폭력과 억압, 혐오는 선택적으로 약자들을 괴롭힌다. 그것도 아주 체계적이고 집요하다. 얼마나 체계적이냐면, 당사자가 아니면 잘 느낄 수 조차 없다. 설화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컸지만, 자신의 집이 가부장적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러나, 설화의 누나는 거듭된 억압과 폭력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작가는 작품의 초반에 'Trigger Warning', 즉 트라우마의 트리거를 당길 수 있는 기제가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작가가 깊은 고민과 성찰끝에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는 소리다. 덕분에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불편한 감정 없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그들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것들에 집중해서 작품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주인공인 춘희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가정폭력과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한 자신, 무관심한 어른들과 제도에 지쳐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더이상 기대하지 않게 된 춘희와 변화의 가능성조차 자각하지 못하던 설화는 서로를 만나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주변인물들의 에피소드가 그려진다. 흥미로운 점은, 해당 에피소드에선 주인공들이 오히려 관찰자의 입장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들이 관찰자로 밀려난 대신, 해당 에피소드의 주인공에 독자들이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혐오와 차별을 다루는 작품이 교조적이거나 교훈적이 되기 쉽다는 말에, 나는 비교적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느낄수는 없다. 때문에 우리는 소통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통해 쉽게 바뀌지 않는 사람이 변하고, 어쩌면 쉽게 변하는 사랑이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폭력의 주체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차별의 주체가 등장하는 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차별에 반응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중에서도, 춘희의 외할머니는 굉장히 인상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지나친 방관, 어떤 면에서는 대단한 관용으로 비춰지기도 하는 외할머니의 존재는 이 작품에서 굉장히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꼭 필요한 존재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다루면서 흔히 떠올리기 힘든, 또는 이미 철지난 소재로만 여겨지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룬 에피소드도 인상깊다. 어른들은 흔히 청소년의 사랑을 애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항을 철없는 행동이라고만 여긴다. 본인들의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고, 또는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너무 쉽게 그들을 규정하고 재단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어른들 중에서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하나의 주체적 인간으로 대하는 어른들의 존재가 고맙고 귀하다.
동백꽃은 겨울에만 핀다. 동백꽃에게 겨울은 삶의 이유다. '춘희'는 <동백꽃을 든 여인>에서 따온 이름이고, 설화는 말 그대로 '겨울의 꽃'이라는 이름이다. 작품의 세계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태몽에도 비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둘이 서로를 만나 변화하게 된 것이 그저 운명 때문이라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들과 주변인을 통해 비춰지는 세상의 모습, 그리고 세상속 사람들의 변화는 감동적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이런 만화를 기다려왔다는 생각을 했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 중에는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라는 말이 있다. 주인공 춘희는 태어나던 시기에 마침 닥쳐온 경제위기로 시작된 가정폭력에 시달린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차별, 혐오, 폭력과 아픔은 나와, 너와, 우리 세대의 일이다. 나의 달력에는 친구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선택한 삶의 마지막 날이 거의 월마다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의 차별과 혐오, 폭력과 아픔은 뿌리깊게 박힌 저주와 같아서, 어쩌면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를 전하는 작품이다. 물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뀐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변화를 받아들이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핀 동백꽃>이 고마운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