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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Jan 31. 2018

#MeToo 그리고 #WithYou

<예민보스 이리나>, 곤, 저스툰, 2018-연재중

    2018년, 가장 기다렸던 웹툰이 왔다. 곤 작가가 저스툰에서 그리는 <예민보스 이리나>가 바로 그 작품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지만 작가의 필명은 '곤'이다. '곤'은 백조를 뜻하는 고니의 옛말이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물 안에서 사력을 다해 물을 저어야 하는 백조를 빗댄건 아닐까.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해 살아온 모든 여성을 대변하는 필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당 PD에 따르면 <예민보스 이리나>의 작가인 곤 작가는 2년 전부터 삼고초려해 데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왔던 터라,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매 회차마다 시작을 알리는 이미지. 트라우마의 촉매가 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예민보스 이리나>는 성인이 된 주인공 이리나가 자신의 첫 트라우마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90년대에 태어나 스물다섯이 된 주인공 이리나는 작가 본인이기도 하고, 동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여성이기도 하다. 나는 남성으로서 가해자였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웹툰에 등장하는 모든 가해자는 그들이기도 하고, 또한 동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남성이기도 하다. 이 웹툰은,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두의 이야기다.


    때문에, <예민보스 이리나>를 보는 내내 우리는 웃을 수 없다. 작품은 즐겁지 않지만, 보는 내내 우리는 거기서 나를 보고, 너를 보게 된다.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누군가에겐 너무나 날카로워 쳐다보기도 힘든 이야기들이 이리나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 웹툰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은, 특히 남성들은 그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똑바로 응시해야만 한다. 리나는 시선을 돌리는걸 허락하지 않는다.

이리나의 말은 작품 속에서 말을 듣는 사람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웹툰을 보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이리나는 '크리스'라는 인물에게 10살때부터 시작된 성폭력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분노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제는 분노가 켜켜이 쌓여 차갑게 식어 단단해진 때문이다. 누군가는 <예민보스 이리나>를 보고 "다 꾸며낸 얘기"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들리는 이야기들이다. 2016년 시작된 #ㅇㅇ내_성폭력 해쉬태그에는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며 당한 온갖 성폭력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2017년에는 #MeToo 해쉬태그 운동이 전세계를 뒤덮었다. 그리고 2018년, 서지현 검사는 인트라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자신에게 가해졌던 성폭력을 고발했다. 꾸며낸 얘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현실이다.


    성폭력을 비롯한 거의 모든 폭력은 권력구조에 따라 수직적으로 일어난다. 위에서 아래로, 권력의 위에서 권력의 아래로 향한다. <예민보스 이리나> 초반부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이야기 중에는 담배를 피운다는 소문이 있던 같은 반 남자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리나는 그 아이를 밀쳤고, 넘어진 그 아이는 씩씩대며 이리나를 노려볼 뿐 때리지 않았다. 이리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안 때린다는 주의인가? 내가 울고 있어서인가?'

같은 반 아이가 리나를 때리지 않은 이유는 울고 있어서도, 여자라서도 아니었다. <예민보스 이리나> 3화 中.

    둘 다 틀렸다. 그 아이가 리나를 때리지 않은건, 늙은 남자 선생의 경고 때문이었다. 한번만 더 다른 아이를 때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나이많은 남성, 그것도 선생의 경고. 그것이 아이를 막았다. 선생의 권위가 없었다면, 그 남자아이는 리나를 때렸을 것이다. <예민보스 이리나>는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나이가 많아서, 힘이 더 세서, 무리를 지어서, 또는 성별이 달라서 가해지는 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이렇게 폭력이 만연한 세상에서, 어쩌면 리나를 '프로불편러', 또는 '예민보스'라고 부르는건 부당하다. 리나 스스로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지 않는 한 그렇다. 리나는 타인이 자신에게 낙인찍는 걸 거부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주장하는게 '프로불편러'고, '예민보스'라면 기꺼이 그게 되겠다는 마음으로, 리나는 싸웠다. 그리고 많은 경우 무력했고,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서지현 검사는 인트라넷에 올린 고발글에서 자신이 이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될줄은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 극단적 선택이 무엇인가 하면, 인트라넷에 글을 올리고 공론화를 하는 일이었다. 자신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우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극단적'인가?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의 피해자성을 평가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보인다. 검찰 내부의 이야기도 소문으로 들려온다. 꽃뱀이라느니, 잘나가는 검사 인생 망치려고 작정했다느니, 실력이 없으니 저런걸로 한건 잡아보려고 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사실 놀랍지 않았다. <예민보스 이리나>에서도 리나는 자신의 피해를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DNA에 새겨져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피해자를 피해자로 놔두지 않는다는 걸.

<예민보스 이리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예민보스 이리나>속의 이리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말하고, 부당함에 싸우고, 그 과정에서 지친 평범한 여성이다. 혹자는 그게 이리나의 이야기의 허구성을 말한다고 평할지도 모른다. 피해자가 '피해자답기를' 바라는 그 의도를, 나는 믿지 않는다. 내가 도와주어 피해에서 구제해줄 정도로 사회 권력구조의 바닥에 위치하기를 바라는 그 추악한 마음을 남들이 모를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작품 속의 이리나는 아름답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애장면에서, 이리나는 대상화되지 않고 한명의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 모습이 반갑다는게 슬프다.


    작품 속에서 이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남성의 이름은 '크리스'다.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한국어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 크리스였을까? 거울을 보고, 내가 했을지도 모를, 또는 저질렀을 가해들을 생각해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MeToo 운동과 더불어 일어난 #MeFirst나 #WithYou, #나도 도_가해자다 해쉬태그는 남성들에겐 사과와 반성이 먼저 필요한 운동이다. 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침묵하지 않겠다'던 연예인들은 모두 침묵중이고, 정치인들은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고발하기 바쁘다. 여전히, 2018년에도 침묵중인 대한민국에 작은 소리가 모여 큰 목소리가 되어가는 과정이길 바란다.


    <예민보스 이리나>는, 작가가 자전적 이야기를 이리나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럽고 가혹하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우리의 생각보다 미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거꾸로 가지 않는다. <예민보스 이리나> 속 리나의 모습을 통해 다시한번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부디, 작품 속 리나의 삶 뿐 아니라 현실속 리나들의 삶 역시 행복해지길. 조금 더 행복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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