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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Feb 09. 2018

조개무덤으로 해일을 막을 것이다

<콘스탄쯔 이야기> 김민정, 네이버, 2008-2012

    김민정 작가가 네이버에서 연재한 <콘스탄쯔 이야기>가 나온지 벌써 10년이 됐다. 2008년 연재를 시작한 작품은 정확히 100화로 연재를 마쳤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은 팩션이다. 김지민이라는 가상의 성폭력 생존자가 학창시절은 물론 평생에 걸쳐 받았던 갖은 성폭력들을 고발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작중에 등장하는 작가는 생존자인 김지민을 작품 속에서만 숨쉬는 인물로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는 작품속의 등장인물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암시를 곳곳에 심어놓는다.

앙굴렘에서 김민정 작가가 찍은 사진. <콘스탄쯔 이야기>는 과연 실화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작가는 여성의 삶 전반에 만연한 폭력을 자각하고,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모습을 김지민을 통해 그린다. 김지민의 각성을 위한 노력을 그리며 ‘누구라도 될 수 있는’ 가해자들을 지목한다. 동시에 ‘피해자 김지민’이 아니라, ‘자연인 김지민’, 또는 '생존자 김지민'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폭력의 대상이 달라질지는 몰라도, 김지민 역시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 웹툰은 성폭력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폭력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폭력은 구조적으로 일어나며, 거기서 피해자 자신조차 자신에게 가해를 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

생존자 김지민은 자신을 파괴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은, 피해자에게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가스라이팅이 아니다. 네가 당할만해서 당했다는 폭력적인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말들을 자신에게 쏟아냈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다. 콘스탄쯔는 그런 자신을 “용서하자”고 말한다. ‘내가 약하지 않았다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참아왔던’, ‘알고도 두려워서 피하지 못했던’ 그런 모든 나를 용서하자고 말한다. 현실감 넘치는 피해자 서사를 그리면서, 작가는 “콘스탄쯔”라는 가상의 인물을 그렸다. 현실에 없을법한 캐릭터다. 아군도, 적군도 아니면서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한다. 경찰이면서 경찰이 아니기도 하다.

'용서하자'는 말은, 자신을 파괴했던, 또는 방관했던 가해자로서의 자신을 용서하자는 말이다.

    이렇듯 경계에 서있는 인물인 콘스탄쯔의 이름은 아마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부인인 콘스탄츠 모차르트(Constanze Mozart, 1762-1842)에서 따온것으로 보인다. 콘스탄츠는 흔히 ‘악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가 쇠약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어오라고 닥달하다가 집을 나가버린 여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결혼 9년간, 콘스탄츠는 자식을 6명이나 낳았다. 그중에 4명이 어려서 죽었고, 두명만 살아남았다. 그런 상황에서 막내를 낳고 얼마 뒤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연금을 받기위해 황제를 직접 알현하기도 했고, 모차르트의 유고작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덕분에 모차르트가 남긴 빚을 다 갚고 남은 두 아이를 키워낸 강인한 사람이다.


    역사속 콘스탄츠와 작품속 콘스탄쯔는 사회의 시선으로 보기에 평범하지 않다. 콘스탄츠와 콘스탄쯔는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모두 남편을 죽였다거나, 최소한 방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시선은 그들을 ‘악처’로 묘사한다. 전형적인 성녀-창녀 이분법이다.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성녀-창녀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 중심의) 가족의 소유물이다. 남성은 가족의 주인이고, 때문에 여성은 부속품으로 취급당한다. 전통적(혹은 현재에도) 시선에서 두 인물은 남성의 부속품으로서 ‘악처’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걸음만 들어가도 알 수 있다. 콘스탄쯔와 콘스탄츠는 여기서 벗어난 존재들이다. 작가가 콘스탄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다.

사회적 세뇌는 생존자에게 피해사실을 잊어버리도록 강요한다.

    콘스탄쯔는 남성들의 이해 바깥에 있는 불가해한 존재다. 그러나, 지민과 민정은 과연 그런가? 그들은 나를 비롯한 남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을 가진 주체인 남성은 여성을 억압해왔다. 사회는 피해자를 지웠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내고 싸우기보다 자신의 피해를 축소하거나 없던 일로 만들어야만 했다. 이 사회에서 생존해 있는 우리는, 모두 어느정도 책임이 있다. 그들의 피해를 터부시하는 사회에 살았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겐 책임이 있다.


    간혹 이 작품에 대해 피해자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그렸다는 평을 보게 된다. 아니, 그 평은 틀렸다. 작가 김민정은 작품 속에서 사회의 시선을 맨몸으로 받아내길 두려워하는 피해자와 함께했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김민정과 김지민의 시선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시선이 아니다. 작품에서 콘스탄쯔가 말했듯 ‘사회적 세뇌’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때문에 작가의 시선에 대한 비판은 부당하다.

<콘스탄쯔 이야기> 79화 '기계의 눈이 보는 것' 에 삽입된 플래시 애니메이션 캡처

    <콘스탄쯔 이야기>는 만화의 형식에서 다양한 시도를 한 작품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대로 잘 짜여진 캐릭터들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한편, 형식상에서는 웹 연재 형식에서만 가능한 애니메이션을 삽입하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CCTV의 화면을 로토스코핑 한 것처럼 보이는 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 또한 작품의 일부로 삽입되어 있다. 꽤나 신선한 시도였던 동시에, 2009년 제주 독립영화제 수상작인 <넌, 혼자가 아냐> 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든 작가 김민정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며 다시한번 사실과 진실을 뒤섞는 장치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 후반부에 연출이 급속도로 전개되며 긴장감이 없어진 점은 아쉽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려왔기 때문에 하고자 했던 말이 끝난 이후의 이야기는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대로 현실의 김지민을 지우기 위한 장치일수도 있다. 다큐멘터리의 연출을 빌려 웹툰을 연재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픽션을 더해 재구성한 이야기다. 이 작품이 가지는 의미는 이미 10년 전에 "생존자 서사"를 아주 가까이에서 치열하게 들여다본 웹툰이 있었다는 점이다.


    작품 속의 김지민은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을 소재로 대상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작품에는 작가 김민정이 김지민의 이야기를 그려내기 위해 고민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김지민의 욕망은 기억을 지우고 다 잊어버리고 싶다는 것. 그리고 김민정의 욕망은 김지민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 두 욕망이 강하게 충돌하고, 그 사이에서 콘스탄쯔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꽤나 모순적이다.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콘스탄쯔는 현실에서의 해결책을 찾고, 가장 평범한 캐릭터인 김민정과 김지민은 만화화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공존하기 힘들어진다. 작가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빌려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어쩌면 현실일지도 모를 사실들에 가짜 진실들을 덧발라 독자들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다. 당사자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독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져 있는 간극을 짚어내며 누군가에게는 진실인 이야기가 누군가에겐 허구로 받아들여지는 간극을 짚어내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세상은 아직까지도 현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작품속 김지민은 "보편적 피해자"로 남기를 거부한다.

    작품 속에서 김지민은 말한다. “당신 역시 나와 같았다면, 괜찮다고, 나도 그랬다고. 당신이 이상한게 아니라고. (…) 결국엔 해냈지만 시기를 놓쳐 아쉬웠던 것. 하기는 했으나 그 방향이 잘못되었던 것들이 당신의 삶 속에서는 되풀이되지 않았으면.” 2008년부터 2012년에 걸친 이 기원은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만약 이 작품이 2018년에 연재되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2018년의 웹툰은 2008년보다 얼마나 앞으로 나아갔는가? 나는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적어도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많이 바뀌었다. 이건, 내가 운 좋은 남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얻어낸 것일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그렇다. 아마도 지금이 이 작품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일 것이다. 2012년에 완결이 난 <콘스탄쯔 이야기>는, 2015년부터 2018년을 거치며 세상에 가지는 의미가 가장 크게 달라진 작품 중 하나다.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그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가?

    “미투”운동을 비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누가 제정신이 아니라더라,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다더라 하는, 가해 사실은 줄이고 고발자를 깎아내려 '이야깃거리'로 전락시키고자 하는 저열한 의도를 가진 이야기들. 사실, 이런 조롱은 언제나 있었다. 100년 전 서프레저트 운동을 비꼰 영국의 남성들, 1966년 동일방직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작품 상에서 범죄가 일어날 당시, 그러니까 2000년대 초반에 나왔던 말을 기억한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 비난에도 끊임없이 조개를 주워 무덤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조개무덤을 비웃던 사람들은, 어쩌면 생존자의 서사까지도 자신들이 독점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재시작 10년이 지난 오래된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이 이 작품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마지막 후기의 제목을 “우리의 행동”이라고 지었다. 세상은 저절로 바뀌지 않는다. 김지민이, 그리고 김민정이 한 일은 조개 하나를 던지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개무덤을 만들어 해일을 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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