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홈> 글 김칸비, 그림 황영찬, 네이버, 2017-연재중
스릴러 웹툰의 대표주자 김칸비와 황영찬이 다시 뭉쳤다. 물론, "다시 뭉쳤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둘은 이미 <후레자식>으로 성공을 거둔 작가일 뿐 아니라, 김칸비 작가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스릴러 장르의 대표 작가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스위트홈>은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김칸비 작가의 이전 작품들은 현실속의 싸이코패스라는 주제를 깊게 파고들었다면, 이번 작품에선 성격파탄자 주인공이 '괴물화'로 인한 멸망에 가까운 재난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욕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파고드는 작품이다.
고등학생인 주인공 차현수는 모종의 이유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다. 머릿속 세상, 한평 방 안에 자신을 고립시키고 인터넷 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던 차현수는, 어느날 가족여행에 가지 않고 있다가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가족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그 뒤, 차현수는 산에 있는 원룸형 오피스텔 '그린 홈'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옆집에는 연예인 지망생이 살고, 윗집에는 베이스를 둥둥거리는 층간소음 유발자가 사는 곳이다.
당연히 차현수는 '여긴 구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느날, 차현수는 자신이 배달시킨 라면이 도착했고, 택배를 문 앞에 놓아두었다는 문자를 받는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택배와 옆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걸 깨닫게 된다. 옆집 문은 열려있었고, 무언가 괴물같은 생물체를 목격한 뒤 집에 숨어있던 차현수는 용기를 내 집 밖에 나왔다가 기절한 뒤 이틀 후에 깨어난다.
이틀 뒤에 깨어난 차현수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지옥이었다. 길 건너의 집들이 불타고 있는 장면과 자신에게 점점 더 잦아지는 환청, 그리고 인터넷 세상에 퍼져있는 '괴물화'라는 키워드. 환청과 환각, 코피와 기절이 그 괴물화의 전조증상이라는 이야기까지.
환청은 집요하게 '너의 욕망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너의 욕망이 무엇이든 자신이 이루어 줄 수 있으니 말하고 인정하면 들어주겠노라 묻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 목소리는 '네 안의 또다른 나'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차현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듣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볼테르는 "진정한 욕망 없이 진정한 만족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볼테르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를 보아야 의미가 있는 말이다. 당시는 계몽주의가 꽃피우던 시대였고, 볼테르는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만족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21세기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욕망을 쉽게 깎아내리는 기제로서 작용한다.
옆집에 살던 여자에게도 같은 환청이 지속적으로 들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의 욕망은 다이어트가 너무 힘들고, 굶는 것이 고통스러워 마음껏 먹고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고통을 한 편으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한 편으로는 쉽게 비난할 수 있다. "그러게 왜 굶어"라는 말은 쉽지만, 그 너머에 기아상태에 이를 정도로 말라야만 한다는 구조를 쉽게 무시하는 메시지가 된다. 이런 방식은 잘못하면 쉽게 교조적이 될 수 있다.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욕망은 쉽게 무시해버릴 수 있는 것이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말은 '진정한 욕망'으로 생존이라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아직 23화까지 연재된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이 부분이다. 사람의 욕망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고 그 층위를 어떻게 나누는가에 따라 이 작품에 대한 향후 평가는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의 <미스트>에 대한 오마주로 보인다. <미스트>에서는 안개낀 마을에 고립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미국 사회에 실재하는 사람들의 표상으로서 등장한다. <스위트홈>에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차현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를 포기한 고등학생으로, 옆집 여자는 다이어트에 목매는 현실의 사람들을, 윗집에 사는 윤지수는 자신의 꿈을 찾는 청년을, 그의 이웃인 정재헌은 독실한 신앙인을, 청계천에서 일했던 한두식은 소외된 중년과 이제는 필요없다고 생각되는 전문가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그린 홈'은 대한민국이다. 세대간의 소통이 힘들다는 점을 꼬집는 회차인 16화에서는 중년 남성인 한두식과 고등학생인 차현수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러나 자신의 세대에서는 일상적인 언어들로 대화하는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친다. 물론, 조금 더 극명하게 캐릭터성을 부여했다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다만, 아직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지점일수도 있기에 평가를 미루어야 할 것이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대한민국의 축소판인 그린 홈, 그러나 괴물들은 전파를 차단하는 능력을 가졌고, 때문에 무선통신으로 이뤄지는 첨단 기술은 무의미해진다.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의 멸망을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기댈 곳은 다른 인간과의 연대라는 아이러니 또한 빛을 발한다. 10월 25일에 자살을 결심한 차현수는, 타인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존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전의 차현수는 자신의 욕망이나 자신의 생각을 표출할 방법이 없고, 사람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았기 때문에 상습적으로 자해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극한의 상황에 몰리고 나서야 차현수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된다. 다름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최종화를 보는 것.
우리는 그의 욕망이 하찮다고 평가절하 할 수 있는가? 진정한 욕망이란 무엇이길래, 우리는 그의 욕망을 하찮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생존에 대한 욕망은 근원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생존함으로써 받을 고통이 있는데, 생존한 이후의 삶을 만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스위트홈>은 이런 지점을 초반부부터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다.
차현수는 이렇게 '하찮게' 보이는 욕망 덕분에 죽을 위기를 넘긴다. 어디에 대놓고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이 욕망 덕분에 죽을 위기를 넘긴다면, 타인의 생존과 자신의 생존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매개라면 그것을 하찮다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주인공인 차현수는 욕망의 정복, 진정한 욕망이라는 말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며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입으로 소리내어 말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앞으로 욕망을 어떻게 다룰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남성 장애인은 등장하지만 여성을 비롯한 약자에 대한 시선은 아직까지 두고 볼 지점으로 남는다. 볼테르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을 이 웹툰에 빗대어 바꾼다면, '나는 욕망한다. 고로 생존한다'라고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스위트 홈>은 욕망으로 인해 파멸에 이르른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생존해 나가는 사람들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