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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Mar 21. 2018

저도, 이번 생은 처음이라.

<오늘의 포도알> 푸릭, 케이툰

    인간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 박사는 "사랑할 사람이 없다면, 우주는 그리 대단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관계란 우리의 삶을 엮어내는 실이요, 그 실로 만들어낸 삶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푸릭 작가가 케이툰에서 연재한 <오늘의 포도알>은, 이렇게 관계에 서툰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게 되는 작품이다.


    주인공 프랑 블랜차드는 수도 그램에서는 물론 나라 전체에서 유명한 '서열 0위의 우주대스타'로 알려져 있다. 뛰어난 연기와 아름다움 그 자체인 외모는 프랑을 인기인으로 만들었지만, 프랑은 팬들을 경멸한다. 자신을 직접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할머니 팬이 달려들자 발로 걷어 차는가 하면, 인기 밴드 오아시스의 말을 오마주해 "가서 굿즈나 사라고"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당연히 팬들은 불만을 갖지만, 프랑의 미소 한번이면 분노마저 사그라든다.


    그런 프랑에게 위기가 닥친다. 팬클럽이 연기하는 프랑을 납치해 버린 것. 그리고 그는, 시골 마을인 캐피셔로 내던져진다. 아니, 정확하게는 목만 남기고 땅에 묻혀버린다. 팬클럽이 프랑의 인성을 고치기 위해 시골마을인 캐피셔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법, 노동의 소중함 등을 깨닫고 팬들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구름반 친구들이 사용하는 포도알 스티커.

    시골마을 캐피셔의 수도원장인 크리스토퍼는 프랑에게 내기를 하나 제안한다. 구름반 아이들이 착한일을 하면 받는 포도알 스티커를 다 모으면 그램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것. 프랑은 당연히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그리고 프랑은 포도따기, 거름주기, 논밭의 잡초 제거 등의 농삿일을 돕게 된다.


    농삿일을 돕던 프랑은 점점 농삿일에 적응하는 한편 농사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 폐쇄적인 시골마을에서 살던 등장인물들 모두 관계에 서툴다. 연애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어 이성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럭스, 마을 외곽에 혼자 살면서 사람들의 선물을 포장도 뜯지 못한채 모아놓고 있는 율진, 동생들을 돌보느라 낮아진 자존감으로 프랑 덕질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케이티, 동네 바보 쟈크와 그 동생이자 케이티에게 라이벌의식을 가지고 있는 제냐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프랑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캐피셔 주민들

    작은 시골 마을이라는 공간적 제약은 이들이 서로 협력하고 살아가도록 강제하는 기제가 되지만, 관계는 노동력의 교환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프랑이 등장해 이들이 가지고 있던 관계구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아슬아슬한 젠가처럼 이루어져 있던 관계가 재정립되는 동안, 프랑이 사람을 보는 방식도 새로 구축된다.


    어릴적 부모에게 버림받아 고아로 살게 된 프랑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은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팬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이라는 생각에 고통받는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았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보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시골 마을 캐피셔로 가서 살면서 자신 외에 애정을 쏟을 대상, 즉 자신이 길러낸 농작물이 생겼고, 그 다음은 자신 주위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옮겨가게 된다.


    캐피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관계에서 애정을 어떻게 쏟아야 하는지를 몰랐던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표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케이티의 경우 사랑하는 대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고, 럭스는 자신이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 율진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살아가며 자신의 외로움을 직시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케이티는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이 장르적으로 추리물과 개그물의 성격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프랑을 캐피셔로 보낸 팬클럽 회장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주어진 정보들을 통해 추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등장인물들의 사정을 통해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은 개그만화의 과장된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어 감정적 몰입과 개그의 대상으로서의 타자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푸릭 작가는 이 간극을 능수능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회차별로 테마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있어서 캐릭터의 성격에 맞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지점이 절묘하다.


    이 웹툰이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관계를 맺지 않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할지 모른다. 우리 모두 이번 생은 처음 살아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관계에 서툴고 상처받는다. 그게 무서워서 관계맺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개그만화가 필요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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