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바우 (잇선, 네이버)
잇선 작가의 웹툰 <우바우>는 우화의 형식을 가진 웹툰이다. 작가는 쥐, 고양이, 강아지, 여우, 펭귄 등의 삶을 빌어 우리의 삶을 조명한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은 사실 아름답지 않다. 존경할 만한 인물은 커녕 꾀가 많아서 못된 동물들을 골탕먹이는 약삭빠른 주인공도 없다. 미래는 커녕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힘든 주인공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내는 동물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무한궤도 속에서
이 웹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단 한가지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삶. 길가에 버려진 채 살다가 주워온 업둥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는게 두려워 관계를 맺지 않고, 차라리 상처주기로 결정한 강아지, 사람들 속에서 고통받았던 시간을 잊기 위해 아예 산 속으로 숨어버린 고슴도치. 작품 속 캐릭터들의 삶은 정체되어 있다. 오래도록 남을 밀어내고, 다른 이들에게서 도피하는 식으로 자신의 삶의 궤도를 찾았으나, 그 궤도는 무한궤도였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지루함과 외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인공들은 매너리즘에 갇혀 살고 있었다.
삶에서 주체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삶에 대해 가지는 만족도는 아주 낮다. 산속에 틀어박혀 글을 쓰는 도치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해 산으로 들어왔으나, 그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과의 관계다. 그러나 도치는 탈모가 온 자신의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자신이 외모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사실 때문에 관계를 포기하려 하지만, 동시에 외로움에 몸서리친다.
*관계맺음에 대하여
이런 주인공들 사이에서 관계란 맺기 힘들고,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관계를 맺으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가장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난방과 째깐이는 고양이와 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였던 째깐이를 주워 온 난방이는 중학교 때 부터 정성으로 키워왔고, 서로가 없으면 안되는 관계를 맺고 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구한 난방은 거듭되는 야근에 째깐이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두려워해 일을 그만뒀고, 째깐은 그것을 인정하고 응원한다. 째깐이는 청소년들의 발언이 무시당하는 것을 뒤집기 위해 운동을 조직하고, 난방은 그것에 어떤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응원해준다. 고양이와 쥐로 묘사되는 난방과 째깐의 관계는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를 규정하지 않는 대신 서로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사실 우리 삶에서 관계란 우리가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옛말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는 것 처럼, 우리는 숨쉬듯이 관계를 맺고 끊으며 살아간다. 원하던 원치 않았던 우리는 관계에 얽매여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말로 정의하는 이유다. 이제 우리는 SNS를 통해 그 범위를 물리적인 세계 이상으로 넓혀놓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로워하며 관계에 목말라 한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관계에 대한 갈증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훈계나 조언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누군가의 헤어짐, 누군가의 외로움을 지켜보는 듯 한 시선으로 우리는 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된다.
*우리는 쾌락을 쫓으며 살 수 있을까?
우리도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부분에서 쾌락을 포기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는 인본주의에서는 '좋게 느껴진다면 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수없이 많은 명사들의 강연에서 '도전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그런 도전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작품에 실패로 비춰지기만 하는 도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난방이는 생계를 위해 들어갔던 곳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자 뛰쳐나왔고, 이 모습은 우리가 원하지만 겁이 나서든, 아니면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하지 못하는 도전이다.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며 수입은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째깐이와 서니와 함께 하는 식탁에 앉아 '하루를 더 살고 싶게 만드는' 된장찌개를 나눠먹는 시간을 누릴 수 있음에 만족한다. 째깐이는 자신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청소년의 존재를 알리고 인식을 바꾸기 위한 조직 '애토피아'를 만들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존재하고, 어른들이 나이를 이유로 무시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한다.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생존을 위해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에는 삶이 빠져 있다. 가족과 함께 앉은 저녁상, 연인과 잡은 손의 따스함, 낮잠의 즐거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목적은 생존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존은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고, 그 이상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만 쾌락이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도전의 서사는 펭씨의 삶을 통해 처참하게 부서진다. 날지 못하는 펭귄 펭씨는 하늘을 나는 것 외에는 쓸모없어진 펭귄 사회에서 벗어나면서 오히려 그들이 날아야 하는 이유를 없애버렸다. 그 이후에 펭귄 사회에는 펭씨가 무시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해왔던 폭탄 만들기가 유행하고, 펭씨는 다른 동물들이 사는 사회로 이주한다. 그 이후, 펭씨는 끊임없이 폭탄을 만들지만, 법과 제도에 갇혀 결국 범죄자가 되고야 만다. 자신의 폭탄으로 사람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우바우는 현대인을 위한 우화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지도, 무언가를 가르치지도 않지만 공감을 안겨준다. 섬세한 표현과 그림과 캐릭터들이 내뱉는 거칠고 강한 언어의 격차는 우리에게 묘한 안도감을 줌과 동시에 그들이 우리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위안을 준다. 서니가 내뱉는 말대로, '삶이란 X발'일지언정 하루 더 살아보고 싶을 만큼 맛있는 된장찌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