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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육비평

학교의 내일, 네 가지 시나리오

학교를 학교답게 복원하기 위하

by 교실밖

학교는 사회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협력, 신뢰와 불신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드러난다. 학교를 어떻게 운영하고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를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의 학교교육이 맞닥뜨린 현실은 어느 한 갈래로 단순히 수렴되지 않는다. 여러 길이 동시에 열려 있고, 그 갈래마다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시나리오라는 형식으로 그려보면, 네 가지 방향이 보인다.


시나리오 1: 현 상태의 장기화


오늘날 학교는 이미 상당 부분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학부모 민원은 행정 절차로 처리되고, 학생들 사이의 갈등은 생활지도보다 ‘학폭위’라는 이름의 준사법 절차로 이어진다. 교육활동 보호 절차 역시 ‘교보위’의 결정에 의존한다. 교사의 판단이 곧 전문성이라는 믿음도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작은 말실수 하나, 지도 과정의 해석 차이 하나가 교육적 해석을 넘어 법적 분쟁으로 비화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런 상황이 그대로 장기화된다면 학교는 본래의 교육 기능보다 ‘분쟁 관리 기관’으로 굳어질 것이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학생은 여전히 등교하고 수업과 학생지도는 이뤄진다. 그러나 모든 관계는 기본적으로 불신 위에 놓이고, 갈등을 다루는 방식에서 교육의 언어는 사라지고 법률과 행정의 언어로만 설명된다.


‘학교다운 학교’라는 말은 점차 낯선 수사가 될지도 모른다. 현실적 가능성이 매우 높은 길이지만, 동시에 가장 지루하고 고단한 길이기도 하다. 교육 효능감이 떨어진 상태에서 공동체 회복은 구호로 그치게 될 것이다. 문제 해결의 본질적 에너지가 사라지고, 관리의 부담만 늘어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시나리오 2: 교육적 해결 능력의 복원


우리가 바라는 길은 이 방향이다. 갈등이 생기더라도 교육적 대화와 화해의 절차를 통해 풀어가는 학교,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입장을 경청하고, 학부모가 교사의 전문성을 존중하면서도 건설적으로 협력하는 학교, 이 경우 갈등은 단순히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가 아니라,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는 학습의 기회가 된다.


물론 일부 학교에서 이런 실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 간의 폭력을 대화와 합의로 풀어내거나, 학부모와 함께하는 대화의 장을 열어 교육적 신뢰를 회복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변화가 체계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 교사의 전문성이 확실하게 보장되어야 하고, 학부모가 학교를 ‘고객 서비스 기관’으로만 보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전체가 교육을 신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시나리오 2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교사 측면에서는 학생의 삶을 이해하고 갈등을 교육적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전문성 훈련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모든 교사들은 수업 전문성에 더하여 학생들의 전인적 발달을 촉진하기 위한 안목을 키워야 한다.


학생들은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동시에 상대의 관점을 존중하는 민주적 훈련이 필요하다. 학생 자치회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실제 협력과 갈등 조정 경험을 통해 공화주의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


학부모들은 학교 문제를 즉각적인 민원이나 법적 대응으로 가져가기보다, 교사와의 대화와 신뢰 속에서 풀어가려는 문화가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과 공론장이 필요하다. 그전에는 학부모가 '내 자식 제일주의'와 '안전 지상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공동체를 교육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행정적 지원 틀이 마련되어야 하고, 언론 역시 학교 갈등을 ‘사건·사고’의 언어로만 다루지 않고, 교육적 해결 사례를 사회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학교 공동체가 합의하고 사회가 지원할 수 있는 과제다.


갈등을 교육적으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은 어느 한 주체만의 몫이 아니라, 교사·학생·학부모·정책 당국이 함께 길러내야 할 공동의 역량이다. 시나리오 2가 당위에서 현실이 된다면 학교는 다시 학교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상태에선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시나리오 3: 과잉 사법화의 무한 팽창


학교 내부에서 교육적 해결이 벽에 부딪치면, 사회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새로운 법을 만들고, 또 다른 위원회를 설치한다. 실제로 지난 10여 년간 학교 현장은 이런 흐름을 감당해 왔다. 아동학대 방지법, 교권보호법, 학폭 관련 법률이 잇달아 개정되었고, 각급 학교와 교육청에는 학교 구성원의 갈등을 다루는 수많은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물론 이 과정은 한편으로 안전망이기도 했다. 교사의 권리 보호가 법제화되면서 억울한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고, 학생들의 안전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에만 의존할 경우 학교는 점차 교육적 상상력을 잃고 법률과 절차만 남는 공간이 될 위험이 있다. 교사는 전문적 판단을 내리기보다 ‘법적 책임’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존재가 되고, 학생들 역시 분쟁을 교육적 대화보다 ‘권리의 쟁취’로만 인식하게 된다.


이 시나리오는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제법 크다. 한국 사회 전반이 문제 해결을 법제화와 절차적 강제에 맡기는 문화로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만 이 흐름에서 예외가 되기는 쉽지 않다.


시나리오 4: 학교의 붕괴, 교육 불가능의 현실화


만약 교육적 해결 능력도, 법적 절차도 모두 한계에 도달한다면? 그때 학교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기관으로 전락할 것이다. 내부의 갈등은 더 이상 조정되지 않고, 외부의 제도 역시 신뢰를 잃는다. 학부모는 사교육이나 대안학교, 해외 유학으로 발길을 돌리고, 학생은 학교를 ‘형식적 의무’로만 다니게 된다. 교사들 역시 소진과 냉소에 빠져 교육적 효능감을 잃는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공교육이 신뢰를 잃고 붕괴의 길로 치닫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학교 무용론’과 '교육 불가능성'이 공론장에서 힘을 얻는 사회, 교육이 더 이상 공적 장치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그런 미래는 우리에게도 도래할 수 있다.


네 가지 시나리오는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 현 상태의 장기화(시나리오 1)는 곧 법과 위원회의 확장(시나리오 3)으로 이어지고, 그 끝은 붕괴(시나리오 4)에 이를 수도 있다. 유일하게 다른 길은 교육적 해결 능력의 강화(시나리오 2)다.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선택은 단순히 한 시나리오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체가 '어떤 조건을 만들고 어떤 문화를 지향할 것인가'의 문제다. 교사에게 전문적 권한을 부여하고, 학생에게 책임 있는 자유를 가르치며, 학부모가 교육적 대화에 참여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 학교 갈등의 화해와 중재 교육을 제도적으로 강력하게 뒷받침해야 한다. 언론과 지역사회 역시 교육적 해결을 사회적 가치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학교가 갈등이 전혀 없는 진공의 공간이 될 순 없다. 중요한 것은 갈등을 법과 제도의 언어로 다루는가 교육의 언어로 다루는 가이다. 체념 속에서 현 상태를 방치한다면, 우리는 법의 확장과 학교 붕괴라는 길을 향해 내달릴 것이다. 그러나 교육적 해결 능력을 회복하고 강화한다면, 학교는 여전히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다.


시나리오 2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어쩌면 영영 먼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을 향해 조건을 만들고, 합의를 모으고, 공동체적 노력을 기울일 때 학교는 다시금 ‘교육의 장’으로 회복될 것이다. 결국 학교의 내일은 제도나 법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정치가, 경제와 사회가 교육에 얼마만큼의 신뢰와 상상력을 투자하느냐에 달려 있다.




* 커버 이미지 https://www.freepik.com/premium-vector/school-building-perspective_7269606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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