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공동체가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에 집중해야
며칠 전 '학교의 내일, 네 가지 시나리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내가 예상하는 학교의 경로는 1. 현 상태의 장기화, 2. 교육적 해결 능력의 복원, 3. 과잉 사법화의 무한 팽창, 4. 학교의 붕괴, 교육 불가능성의 현실화였다. 이 중 시나리오 2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정적 결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교육정책의 중심은 시나리오 2에 대한 이해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전략에 놓여야 한다.
시나리오 2는 학교가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여 교육공동체로서 제 역할을 다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교사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학생과 교육적 관계를 맺고, 학생은 성장과 배움의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학부모와 지역사회는 교육공동체의 일원으로 협력하는 모습이다. 이때 학교는 단순한 지식 전달 기관이 아니라 민주적 시민을 기르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이 된다.
교육정책에 관한 한 여러 이해가 충돌하고 영역 간 경합과 각축이 심각하게 일어나므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분들은 이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대한 이해와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물론 각론적 해결 접근 방식을 택할 수도 있지만, 이는 개별 정책의 개선 방안을 찾아 해결하는 과정들이 누적되면 전체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안이하고 낙관적인 전망이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접근 방식은 그러한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개별 정책마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론을 의식하여 눈에 보이는 단기적 처방을 반복하다 보면 근원적 문제 해결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우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학교의 모습을 그리는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합의할 수 있다면 나머지 개별 정책들을 개선하는 방향은 정확히 학교 개선의 최종점, 교육의 궁극적 목표로 집중돼야 한다.
나는 최근 몇 년 간 교육정책에서 교육의 주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57년 구소련이 스푸트닉을 발사한 후 미국은 교육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는 학문중심 교육과정과 행동과학적 심리학의 공조였다. 1960년대 후반 이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요셉 슈왑은 본인의 논문 'The Practical : A Language for Curriculum'에서 어떤 학문이 위기를 맞을 때 나타나는 몇 가지 징후가 있다고 일갈하였다.
그는 징후 중의 하나로 어떤 학문 분야 내의 문제와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그 분야의 전공자로부터 타 분야 전공자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을 꼽았다. 실제로 스푸트닉 발사 이후 교육과정 전공자들은 우즈홀 콘퍼런스에 단 한 명도 초대받지 못했고 교육학자들 역시 찬밥 신세였다. 당시 미국 교육과정을 주도했던 이들은 모학문의 학자였다. 수학교육자가 아닌 수학자, 과학교육자가 아닌 과학자였다.
그리하여 어떤 분야의 전공자들이 국외자로, 관찰자로, 코멘트하는 사람으로, 역사가로, 타 분야 전공자들이 그 분야에 가져온 공헌을 비평하는 비평가로 바뀌는 현상이 발생했다. 나아가 옛 지식에 새로운 것을 별로 추가하지 않은 채 새로운 언어로 반복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논쟁적이며 논란의 여지가 많고 인신공격적 토론이 현저하게 증가한다고 슈왑은 분석했다.
오늘날 우리 교육계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 교육관계자나 현장 교육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대신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들이 교육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한 효율성 논리나 시장 원리를 교육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슈왑이 지적한 학문 분야의 위기 징후와 정확히 일치한다.
슈왑의 제안 이후 '로체스터 콘퍼런스'가 열렸고 이때 모인 사람들이 소위 '교육과정 재개념화주의자'로 불리게 된다. 실제로 당시 미국 교육과정을 지배하던 개념은 기술적 합리성과 논리 실증주의에 입각한 '과학적 교수기법'이었다. 학습은 가시적이며 명세적 목표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 '느낀다', '감상한다' 등의 추상적 개념을 가진 목표를 '몇 개를 풀 수 있다' 등의 구체적이며 행동적인 목표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문제해결적 목표와 표현적 결과를 추가하여 교육과정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교육적 감식안'의 주창자로 알려진 엘리엇 아이즈너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완전하게 정착하지 못했지만) 수행평가, 과정중심평가의 시원이 됐다.
내년에 교육감 선거 과정에선 '학력'에 대한 이슈가 있을 것이다. 초등 지필평가 부활, 수행평가 축소, 방과 후 선행학습 허용 같은 퇴행적 공약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나는 학습자의 변혁적 역량과 교사의 변혁적 역할을 강조하는 OECD와 유네스코의 제안, 깊이 있는 학습을 강조하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의미를 신뢰하는 편이지만, 애석하게도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학력'의 본래적 의미는 납작하게 바뀐다.
역량 교육이 학력 저하와 교실 붕괴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OECD의 역량 구성 중 지식 영역이 학문적, 간학문적, 인식론적, 절차적 지식으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저 '혁신교육=학력저하 및 교실붕괴'를 외칠 뿐이다. 개선을 말하는 사람들도 너나 없이 줄 세우기 대학입시를 핑계 댄다.
나는 이러한 '선발적 교육관'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인 처방이라며 '공정 논리에 기댄 정책'이 학교를 시나리오 2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여 이젠 도무지 가능하기나 할까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발적 교육관은 학교를 회복 불능의 과잉 사법화의 공간으로 만들고, 학교 붕괴와 교육 불가능을 현실화하는 지름길이다. 공정 논리 뒤에 숨어 이를 외면하는 사이 학교는 훨씬 더 황폐해지고 있다.
'학교를 학교답게 회복하는 것', '교육공동체가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합의할 수 있다면 이에 따른 전략 역시 과감하게 '선발적 교육관'을 극복하는 쪽으로 집중해야 한다. 우린 교육 정책이 현실적 타당성 운운하며 간을 보고 또 보다가 골든 타임을 놓친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 교육전문가들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단기적 성과에 매몰되지 않는 중장기적 교육 비전을 수립해야 한다. 아울러 정책은 학교를 경쟁과 서열화의 도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육공동체의 성장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나아가 교사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학교에서 발생한 문제를 풀 때 법부터 따질 것이 아니라 교육적 논리에 입각하여 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지난 글에서 여러 번 주장한 바, 국가교육위원회와 교육부, 시도교육감협의회는 이것저것 재고 타산할 시간이 없다. 국가 교육 거버넌스의 재구조화와 학교 공동체를 교육적으로 회복하는 전략은 병행되어야 한다. 앞으로 6개월에서 1년이 지나면 개혁은 힘들어질 것이다.
한 가지 걱정인 것은 내년 시도 교육감 선거 과정에서 '교육공동체 회복'은 언술에 그칠 것이고 후보들은 너나 없이 표를 구하는 공약을 남발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시나리오 2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정치 논리라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선거 과정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퇴행적 공약들—지필평가 확대, 경쟁 강화, 서열화 부활—은 겉으로는 학력 향상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교육공동체를 더욱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런 공약들이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함을 시민들이 알아야 한다. 진정한 교육 회복은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
도대체 선거를 거듭할수록 학교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선거는 누구를 위한 선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