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면 죽는다'를 부르던 젊은 날
수업 끝나고 나왔더니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백양로가 푸릇하다. 지난주 연고전이 있어서 그런지 뭔가 축제 뒤끝의 묘한 분위기가 있다. 중앙도서관에 다다르니 옛 추억이 생각난다. 89년 5월 전교조를 결성하고 나서 초겨울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그 이듬해일 수도...) 당시 대학 캠퍼스에서 집회를 하려고 하면 모든 출입구를 막고 원천봉쇄를 했다.
이 대학에서 집회가 예정돼 있어 안산을 넘어 북쪽에서 '개구멍'으로 진입하는 데 어찌어찌 성공했다. 2박 3일짜리 집회였으므로 식사는 김밥으로 때우고, 잠은 중앙도서관 열람실에서 잤다. 테이블에 누워서 잤던 기억이 있다. 낮엔 종일 집회를 하고 밤엔 모여서 토론했다. 합법화 쟁취의 그날까지 맞서 싸우자고 다짐하면서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불렀다. 지금은 내부 구조가 완전하게 달라졌고, 완전히 면학 분위기가 충만하다.
도서관을 만나면 책을 읽거나 공부했던 기억이 나는 것이 맞지 않나. 수십 년 전 폭압적 정권에 맞서 싸우던 기억만 선명하다니 확실히 내 젊은 시절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문에서 대치하다 전경과 백골단이 최루탄을 빵빵 쏘면서 교내로 진입하면 잡히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진 노천극장까지 뛰어 올라갔다. 이 길이 비탈길이라 최루탄은 여기저기서 터지지 노천극장 앞까지 가면 모두들 웩웩거리고 구역질을 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돼 다시 대오를 형성하여 '흩어지면 죽는다'를 부르면서 철수하는 전경들을 따라 내려가면 다시 교문을 사이에 두고 지루한 대치를 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젊은이들끼리 증오할 일도 없는데, 서로 자기 일을 했던 거다. 전경들은 그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냈고, 대학생들과 함께 싸웠던 교사들은 2박 3일 투쟁을 끝내고 지회별로 모여서 막걸리를 마시며 무용담을 말하던 시절이다.
94년 3월 복직 후에 늦공부 열정이 찾아와 열심히 공부했다. 컴퓨터교육, 교육공학, 교육과정에 이르는 30년 공부 여정이었다. 오늘 미루어 두었던 서재 정리를 마무리했다. 8-90년 대에 사회과학 분야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 보던 책들은 이미 다 버려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더 이상 책장을 늘리지는 않기로 배우자와 약조했으므로, 꽂을 공간이 없는 책들은 미련 없이 큰 박스에 담아 분리배출을 하려 한다. 분야별로 정리하여 재배치하다 보니 내 전공인 교육과정 책 보다 철학 분야의 책이 훨씬 많다. 문제는 그 학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거... 그냥 사는 과정에서 선택하고 판단하는 안목을 높였을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면서 산다.
내일부터 다음 주 초까지는 한국에 없다. 맥주도 마시고, 해변가에서 러닝도 하고, 산에 올라가 머리 좀 식히고 오려고 한다. 수술 후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다.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다. 그냥 여권 하나 달랑 들고 다녀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