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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담화

자유를 얻은 자의 슬기로운 합리화

묵은 책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 시절 풍경도 함께 떠올랐다

by 교실밖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 작년 8월 말 재활 중에 정년을 맞아 벌써 일 년 하고도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작년 이 즈음엔 회복에 집중하고 있을 때라 정년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올해 1월부터 개인 PT, 4월부턴 러닝을 시작했다. 부상 없이 달리는 안전하고 건강한 러닝이 목표인지라 내 몸에 맞게 천천히 뛰고 있다. 그동안 야외에서 총 68회를 뛰었고, 대회에도 한 번 출전하여 10km 완주 메달을 받았다.


이제 짧은 거리는 비행기를 타도 될 것 같아 인천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칭다오에 3박 4일 휴식 여행을 다녀왔다. 가까운 곳이라 해도 엄연히 남의 나라이니 준비할 것도 많고, 살펴야 할 것도 많았다. 중국 여행은 이번이 네 번째인데 마지막 간 것이 2005년이었으므로 20년 만이다. 그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대륙적 디지털 일상화'를 실감했다. 알리페이, 위챗, VPN, 바이두지도, 와이페이모어, 디디택시... 등등을 깔고 간체를 한글로 번역하면서 익혔다. 아무튼 무탈하게 잘 다녀왔다. 잘 쉬었고 잘 먹었다.


더위가 살짝 가시니 그동안 미뤄두었던 서재 정리를 하기로 했다. 매일 정리한다고 이 책 뽑아 저 쪽에 꽂는 식으로 했더니 정작 중요한 때 책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몇 박스를 골라내어 분리배출로 내보냈다. 이제는 10여 권도 채 남아 있지 않은 80년 대 책은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다시 한번 읽히길 기대하고 있다.


묵은 책 향기를 맡을 때마다 그 시절 풍경도 함께 떠올랐다. 끝내 버리지 못한 책 목록에 우상과 이성, 교육과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시대의 교육 등이 있다. 한때는 모두 이런 종류의 책으로 서가가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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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제 별로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교육학 책 다음으로 많은 것이 철학 분야의 책이다. 새삼 스스로 부끄러웠다. 철학이라면 뭐 하나 정리하여 말도 못 하는 주제에 책만 끼고 살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심리학, 사회학, 행정학 분야의 책들도 마찬가지다. 문학도 그러하고. 그렇다고 교육 분야에서 뭔가 그럴듯하게 아는 체를 할 수도 있는 상태도 아니니 자괴감이 속절없이 증폭했다.


그러나 곧, 이렇게 읽은 책들은 드러나는 쓰임이 없었을 뿐, 내가 사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이끌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이 책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 모니터 앞에 앉아 한가하게 글을 적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유를 얻은 자의 합리화는 때로 이렇듯 편리하다.


올해 들어 글을 많이 썼다. 책 한 권은 출간했고, 두 권은 출판사와 협의 중이며 한 권은 기획을 끝내고 집필에 들어갔다. 3월부턴 대학에서 예비교사들을 만나고 있고, 여기저기 초청 강의도 나가고 있다. 내 기준에선 매일 바쁘게 살았으므로 흔히 찾아오는 '정년 공허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러할 것이다. 이번에 책을 정리하면서 확실히 느낀 것인데 '또렷하고 체계적인 계획' 같은 것은 앞으로도 잡지 않을 것이다. 자유를 얻은 보람을 좀 더 길게 누리고 싶다.


가끔 정색하고 거울을 보면 확연히 노화한 얼굴이 보인다. 병치레 뒤끝이라 그럴 수도, 러닝을 하나 보니 주름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세월을 승복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주름진 얼굴이 두렵진 않다. 다만, 격렬했던 젊은 시절, 긴장 속에 살았던 정년 전 10년을 이젠 순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순하게 늙었다는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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