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왜 이럴까

불확실성 속의 일관된 패턴 읽기

by 교실밖

트럼프의 말과 행위는 일관성이 없고 즉흥적이다. 매순간 기괴한 것은 물론이고 앞뒤 맥락도 맞지 않는다. 도대체 미국의 정치는, 미국의 시민들은 그를 왜 통제하지 못할까.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불확실성과 비일관성에 드리운 일관된 패턴을 들여다보자.


모든 행위가 거래로 환원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트럼프 방식이다. 전쟁도, 동맹도, 핵 억제도 그에게는 거래의 지렛대일 뿐이다. 중동에서의 심각한 외교적 위기 상황을 두고 “총체적이고 완전한 승리, 100퍼센트,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외교의 언어가 아니라 부동산 거래의 언어다. 그는 지금 “내가 이겼다”라는 서사에 강박증이 있는 듯하다.


'보여지는 것'에 대한 집착도 빼놓을 수 없다. 외교적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에 격투기를 관람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 전쟁의 진지함과 기괴한 퍼포먼스를 한 화면에 드러내는 것은 통치 방식이라기보다 일종의 쇼에 가깝다. 대중은 역겹다고 느끼지만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카메라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콘텐츠가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이다.


지금은 정치적 효용이 모든 외교적 합리성을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이라는 명백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강경 노선을 유지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지지층에게 ‘강한 미국’의 서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과의 합리성이 아니라 수행의 효과가 기준이 된다.


내 생각에 더 본질적인 문제는 트럼프라는 개인 너머에 있다. 미국이라는 ‘민주공화적’ 시스템은 왜 이를 제어하지 못하는가. 의회가 대통령을 견제하고, 사법부가 양자를 조율하며, 언론이 모두를 감시하는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은 본래 동의하지 않는 다수를 전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정교한 시스템은 한 가지를 전제한다. 제도의 행위자들이 당파적 이익보다 헌법적 가치와 제도 자체의 보존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지금의 공화당 의원들에게 자기보존 본능은 트럼프 진영에서의 생존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제도가 견제 기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제도 안의 인간이 헌법적 가치에 대한 충성을 상실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 시민사회의 피로감도 보인다. 첫 임기 4년, 바이든의 4년, 다시 이어지는 시간 동안 사람들은 이미 충격에 면역되었다. 어제의 충격이 오늘의 일상이 되고, 비상사태가 새로운 정상이 된다. 앞으로 미국이라는 강대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가 보아도 트럼프는 통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다. 그에게 대통령직은 정책적 결과를 산출하는 자리가 아니라, 매일매일의 드라마를 생산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결과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애초에 그가 결과를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매 순간의 장면이 강렬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만약 이 거친 진단이 옳다면, 더 무서운 함의가 있다. 21세기의 정치와 세계는 이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트럼프는 예외가 아니라 하나의 '징후'일지 모른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은 짧은 주의 지속 시간과 도발적 콘텐츠에 보상을 주면서 연기로서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완벽한 토양이다. 트럼프는 이 토양 위에서 자라난 가장 성공적이며 기형적인 표본일 뿐이다.


그리하여 대중의 실망은 단지 한 사람의 정치인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치적 조건 자체에 대한 깊은 실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어떻게 사유와 판단의 깊이를 길러줄 것인가를 다시 묻게 만드는 지점에 위태롭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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