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육이 병든 원인 중 으뜸인 것으로 나는 노동(일)교육의 부재를 꼽는다. 극한의 대입시 경쟁도 따지고 보면 '일은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구하는 것에서 비롯한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노동의 소중함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노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도외시하고 노동을 피해 부자로 먹고사는 일을 구하는 과정이 곧 공부요, 입시요, 취업이다. 이오덕 선생은 이런 사정을 두루 간파하고 '일하기 중심의 교육과정'을 강조하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을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일하면서 자라나는 농촌의 아이들이, 전혀 일이란 것을 모르고 있는 아이들의 얘기만을 교과서로 읽고 배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일하기를 천하게 여기고, 일하는 사람을 멸시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됨을 말한다. (민주교육으로 가는 길, 이오덕, 224쪽 )
수호믈린스키는 조금 더 선명하게 노동교육의 의미를 밝힌다. 그는 노동교육이 직업 안내와 훈련을 넘어서 노동활동에 대한 창조적 지향과 긍정적 태도의 계발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파블리시 학교에서 교사들을 선발할 때 학생들에게 전수해줄 수 있는 특별한 노동기술을 조건 중 하나로 내세운 것도 같은 이유다. 일하는 교사의 모습을 아이들이 보는 것은 교육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 수호믈린스키가 추구하는 인간상은 '공익을 위한 노동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었다. 일하기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자 했던 이오덕, 노동교육을 전인적 발달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던 수호믈린스키는 여러 측면에서 닮은 '노동관'을 가졌다. 두 사람이 교류했을 리 만무한데도 유사성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수호믈린스키는 '이른 나이에 생산적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아이들은 한 명 한 명 빛나야 한다, 143쪽) 이오덕은 '일은 아주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한다'라고 말한다. (위의 책, 227쪽) 놀랍도록 유사한 문제 인식이다. 두 사람 모두 어렸을 때부터 흥미를 끄는 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땅히 어릴 때부터 일을 하게 해야 하고, 어릴 때부터 할 수 있는 하도록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손발을 적당히 움직여 일을 함으로써 몸이 자라나게 하고, 지혜가 늘도록 하고, 세상을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고 참교육이다. (위의 책, 228쪽)
7세 내지 8세가 된 우리 학교 학생들은 이미 상당한 사회적 의의가 있는,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노동을 수행한다. 특정 유형의 노동은 오직 이 나이 때 아이들만 하는데, 이것은 우리 학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아이들은 1학년이 되기 두 달 전부터 나무 씨앗을 모으는 것으로 노동활동을 시작한다.(위의 책, 144쪽)
이오덕은 일하기의 목표를 결과보다 과정에 두자고 했다. 일을 놀이나 운동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상태로 할 수 있게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일하는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고, 그 일하는 과정에서 온갖 유익한 지식과 기능과 지혜와 건강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수호믈린스키 역시 노동을 흥미로운 스포츠에 비유하면서 일 속에서 즐거움과 재미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두 사람이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다. 이오덕은 일하기 교육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하였다.(위의 책, 232쪽)
첫째, 모든 사람이 다 해야 한다. 둘째, 학습하는 사람의 힘에 맞게 해야 한다. 셋째, 결과보다 과정을 무겁게 여겨야 한다. 넷째,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 보람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수호믈린스키 역시 조화로운 전인적 발달의 필수 요소인 노동교육에 대한 특별한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의 책, 143쪽)
첫째, 이른 나이에 생산적 노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다양한 노동활동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노동활동은 장기간에 걸쳐 수행될 때 효과적이다. 넷째, 모든 노동은 창조적 측면과 지적 측면을 갖춰야 한다. 다섯째, 예외 없이 모든 학생은 생산적인 노동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여섯째, 노동으로 인해 다른 관심사를 차단하면 안 된다.
노동교육에 대한 두 사람의 유사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노동(일)교육이 갖는 보편적 의미 때문이다. 노동은 삶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노동의 대가로 생계를 영위하며, 노동을 통해 공익을 위한 사회적 참여를 실현한다. 인간은 노동활동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다. 노동교육은 빠를 수록 좋다. 2017년초 <서울미래교육의 상상과 모색>을 집필하면서 학교의 기능을 학습, 일, 놀이, 쉼이 일어나는 장소로 규정했다. 지금 공간을 다루는 여러 문헌에서는 '일'을 제외하고 학습, 쉼, 놀이로만 개념화하고 있는데 사실 학교에서 다루어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노동 상황에 노출될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런데 이 노동교육이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합시다'라고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과정을 편성할 때 노동교육의 요소들이 조화롭게 담기도록 하는 설계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성인들의 인식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성인들이라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천시할 이유가 없다. 자녀에게 '너는 부모처럼 살지 말고, 적게 일하고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구하거라'와 같은 말은 이미 교육에 대한 왜곡을 포함한다. 물론 노동에 대한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는 것은 역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노동(일)과 교육과정의 결합은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한다. 교육과정을 이수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어떤 수행하거나, 교육과정을 구현하는 방법이 수공노작의 방식이거나, (디지털 매체를 포함하여) 창조적 생산물을 내는 쪽으로 설계하면 좋겠다. 손발을 움직여 무엇인가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지혜를 사용하며, 또한 타자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생산물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수성, 여기에서 전인적 발달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