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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05. 2023

먹는 행위

생명 유지를 넘어선 엄중하고도 고귀한 것

얼마 전 ‘랍스터 급식’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던 한 고등학교 영양사께서 화제가 됐었다. 성장기에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랍스터 치즈구이나 장어 덮밥 등 학교 급식에서 볼 수 없었던 메뉴를 선보였던 이 영양사는 이후 모 대기업으로 이직했다고 한다. 영양사는 매번 학생들이 선호하는 메뉴를 개발하여 식단에 올렸고, 학생들은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 한 끼에 3,800원 하는 급식비로 식단을 짰다고 하니 그 수고 또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본문의 영양사가 제공한 급식


학교나 군대, 혹은 직장에서 그 구성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급식'이라 한다. 급식의 특별한 점은 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식판'을 쓴다는 것이다. 대개는 스테인리스 혹은 플라스틱 재질로 돼 있다. 배식대 앞에 줄을 서서 수십 개씩 쌓아 놓은 꼭 같은 모양의 식판 하나를 집어 들게 돼 있다. 급식 행위에는 수많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고려가 숨어 있다.

우선 꼭 같은 식판을 쓰기 때문에 배식이 편리하고, 같은 밥과 국, 같은 반찬을 지위에 상관없이 평등하게 먹을 수 있다. 배식대에 도착한 사람들은 마치도 일관작업열 위에 놓인 부품들처럼 비슷한 행위로 밥과 반찬을 담고, 국을 받아 양손으로 조심스레 식판을 받쳐 들고 테이블로 이동한다. 테이블에 앉아 비슷한 모습으로 식사를 한다. 식사 시간도 거의 비슷하다. 매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먹으니 체질도 비슷해질지 모르겠다. 식사 후엔 잔반 처리를 위해 이동한다. 잔반을 처리하고 난 빈 식판은 차곡차곡 쌓여 설거지를 기다린다. 급식 과정은 신속하고 효율적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먹고 그로 인해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큼 엄중한 행위가 또 있을까. 인간은 제각각 자기만의 스타일로 먹고 싼다. 그게 삶의 순리다. 그러나 급식은 개인의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시스템은 그 구성원들에게 동질의 경험을 공유하게 만든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식사를 같이한다'는 독특한 문화적 동질감과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매개이기도 하다. 급식이 있는 곳에는 집단 특유의 문화가 있다. 그곳이 학교이든, 군대이든, 직장이든 말이다.

너나없이 줄을 서고, 비슷한 자세로 밥을 먹으며, 식기를 반납하는 기계적 행위 속에서 존중받는 느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존중과 경제성은 이미 같은 가치로 교환이 성립됐기 때문이다. 인간이 존중받는 느낌이 언제냐 하면 바로 무엇인가를 '잘' 먹을 때다. 음식을 끊는다는 단식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가를 주장하기 위함이다.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인 먹는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단식이다. 그만큼 '먹는 행위'는 생명 유지를 넘어선 엄중하고도 고귀한 것이다.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때 단체 급식 역시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고려들이 필요하다.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를 보면 인민군 장교가 마을 촌장에게 부락민을 휘어잡는 방법을 묻자 “뭘 마이 멕여야지 뭐…”라고 대답한다. 그만큼 '먹는 것'은 생존에 있어 중요한 행위요, 리더십을 가르는 요소라는 말이다. '아침밥을 함께 먹는 사이'는 매우 가까운 관계를 암시한다. 살림을 함께하는 사이이다. 무엇을 함께 먹지 않고서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 김훈은 라면을 끓이며 "진부한 삶의 순환에 안도하였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진부한 삶은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그 사람에게는 일상의 엄중함이다. 어쩌면 열심히 산다는 것은 지리멸렬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삶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목숨만큼이나 중하다는 것을 서로 이해하는 일이다. 타인의 '먹는 행위'를 귀하게 여기자는 말이다.




이미지 출처: 여기 저기 구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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