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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Dec 16. 2022

존재의 숫자화

소속감과 관리의 편익 사이 어디에선가 인간은 하나의 일련번호로 존재한다

요즘 큰 건물의 지하주차장은 넓기도 하거니와 층수도 여럿이다. 바삐 주차를 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나중에 차량의 위치를 찾지 못하여 난감했던 경험이 있다. 기억을 쉽게 하기 위해 기둥에 쓰여 있는 위치를 나타내는 표식을 사진으로 찍어두기도 한다. 가령 사진에서 처럼 B4 B 401이라면 지하 4층에 B열, 401번 기둥이라는 말이겠다. 



고속열차를 이용할 땐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한다. 그런데 예약 완료 즉시 내가 타야 할 기차와 시간을 기억할 수 있는가. 기차를 탈 때까지 이 티켓을 서너 번은 봐야 겨우 내 자리를 찾아간다. 날짜야 그렇다 치고 KTX050이라는 기차 번호에 플랫폼과 객실, 좌석 번호까지 있으니 한 번에 몽땅 기억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언젠가 타야 할 곳 말고 엉뚱한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옆 플랫폼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바람에 

진심 당황했던 적이 있다. 미친놈처럼 계단을 타고 내려과 옆 플랫폼으로 가서 막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에 올라타기까지 얼마나 빨리 뛰었던지 모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몹시 숨이 찼고, 어지러워서 쓰러질뻔한 기억이 있다. 



이렇듯 현대의 모든 장소는 숫자화 된다. 고정된 장소와 움직이는 탈것을 막론하고 모든 장소는 개인 구역으로 분할되어 번호가 매겨진다. 이를 외우고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기억이 흐릿해지니 주차 기둥의 사진을 찍어두거나, 기차의 온라인 발권 티킷의 경우에도 해당 객실의 내 자리를 찾아 앉을 때까지 몇 번을 들여다봐야 한다.

하긴, 주민번호나 여권번호 같은 고유식별번호는 또 어떻고? 그게 없다면? 물론 개인이 입장에선 끔찍하다. 존재가 증발한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것의 필요는 개인보다 관리 측면이 더 크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번호를 하나씩 부여하여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관리하자는 목적이 크다. 고유식별번호가 없으면 세상에 '부재'한 인간이 되기 때문에 선거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을 수 없으며, 은행업무도 볼 수가 없다. 생각이 대책 없이 꼬리를 물었지만 인간에게 번호란 그런 거다. 소속감과 관리의 편익 사이 어디에선가 인간은 하나의 일련번호로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디지털(digital)'은 자료나 정보 따위를 이진수와 같은 유한 자릿수의 수열로 나타내는 것이다. 정보화, 네트워크화, 인공지능화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숫자를 부여하여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도록 코드화하는 일이긴 하다.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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