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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un 02. 2021

꽃잎처럼

1980.5.27 그 새벽의 이야기

정도상의 장편소설 <꽃잎처럼>은 시민군 청년의 간절한 사랑 이야기이자(황석영), 그들의 사랑에서 지금 여기까지 와 있는(안도현) 5.18에 관한 서사이다. 1980년 5월 26일부터 5월 27일 새벽 5시 15분까지 시간대별로 이뤄지는 현장 묘사가 이 책의 구성 방식이다. 독자들은 이 목차만 보아도 긴장과 압박을 동시에 느낀다.  그날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의 진압작전에 맞서 도청을 사수해야 했던 시민군들은 그 시간대별로 무슨 이야기를 했고, 그들의 심리상태는 어떠했을까. 작가 정도상은 가공인물 '스물한 살 명수'의 눈으로 그날 그린다. 명수는 사람들 사이로, 혹은 그들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와 도청 내부를, 때로 바깥에서 도청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채운다.   

정도상 장편소설 <꽃잎처럼>


명수는 가공인물이면서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그날 도청에는 대학생과 시민, 그리고 '공돌이'라 불린 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의식의 눈을 떠가던 공돌이 청년은 그 장소를, 그 시간을 세밀하게 설명한다. 공돌이 청년 명수를 화자로 세운 것은 저자의 탁월한 선택이다. 배운 사람이 자신의 지식에 기대하여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배운 사람의 '의견'이 많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국졸이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공돌이 청년이 보았던 그날의 도청은 논평이나 분석이 없는 선명한 묘사이다. 명수의 설명으로 시민군에 가담했던 실존인물들의 행동이 하나하나 현재화한다.    

"이 도시에 공수부대의 총칼 아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을 때,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는 아름답고 좋은 말과 노래가 흘러나왔다."(23쪽)


독자들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군데군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데, 내가 첫 번째로 울컥한 대목은 바로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에서 '아름답고 좋은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군부가 장악한 방송은 나라의 한 편에서 이뤄지는 학살을 외면하고 아름답고 좋은 말로 이 나라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선전'을 반복하였다. 많은 청년들이 그 방송을 들었다. 당시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학살이 자행되던 바로 그때 청취자는 아름답고 좋은 말을 들었다. 한 번 지나간 역사는 묻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현재적 기점에서 소환된다. 그리하여 끊이지 않는 죄책감을 준다. 그것이 나를 울컥하게 했다.


이후 소설은 26일 저녁부터 27일 새벽까지 충실하게 상황을 그린다. 긴장감이 높아지는 27일 새벽, 도청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도부는 고등학생과 여성을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했다. 참여도 중하지만 살아남아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시민군 중 누구도 대열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늘 밤 공수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할 것입니다. ... 우리는 오늘 밤 패배할 것입니다. 하지만 영원히 패배하진 않을 것입니다."(32-33쪽)

그들은 오늘 밤 패배를 선택함으로써 영원이 패배하기 않기로 한다. 그날 시민군의 생각은 그대로 역사가 되었다. 그 밤 패배가 두려워 순순히 도청을 내어 주었다면 그래서 승자가 기록하는 역사가 계속되었다면 5.18이 민주항쟁으로 기록되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공수부대가 진입한다는 징후가 농후해지는 27일 새벽의 상황묘사는 숨이 막힌다. 몇 번을 책을 놓고 심호흡을 했고, 솟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작가는 불과 40년 전의, 그리고 나이 스물에 이른 내가 들었고, 기억했던 광주의 이야기를 근접촬영하는 영화처럼 그린다. 당시 그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과 젊은이로 느꼈던 죄책감 감 사이에 무엇이 있었을까.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일상에 충실했다.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 더러는 감옥으로 들어갔고, 극히 일부는 유족 앞에서 양심고백을 했다. 늦은 고백을 지지한다. 고백할 수 있는 용기는 그 이후 삶을 가치롭게 한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아래와 같다.


"나는 오늘 밤 여기에 머무르기로 했다."  

새벽에 이글을 쓴다. 글을 더 보충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내 짧은 서평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책 전문을 읽는 것이기 때문에 가급적 책 내용 전달을 최소화하였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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