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를 넘어 새 시대를 여는 시민 교과서'라는 부제에 끌려 몇 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다 읽었다. '좌우를 넘어'라는 표현은 '중도의 입장에서'라든지 '제3의 길' 같은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일관하여 '대안적 좌파'의 시각을 견지한다.
우리는 양쪽에 좌파와 우파라는 한물간 이데올로기를 두고 그저 제한적인 선택을 하는 데 얽매여 있다. 좌파의 경우, 너무나 많은 이념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혁신주의 시대와 1930년대 뉴딜 시대 사이에 형성된 패러다임에 아직도 갇혀 있다. -21쪽
저자들은 좌파가 사회문제를 다룰 때 상명하달식의 권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국가 중심적 접근방식이며 산업화 시대에는 타당했을지 모르나, 오늘날 네트워크화된 체제 하에선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파의 논리에 대해서는 시대적으로 더욱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자유방임주의 경제, 그리고 "나를 밟지 마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시민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개념들은 농업인구가 약 300만 명에 달하고 이들 중 일부만이 투표권을 지녔던 1775년 당시에는 꽤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하고 상호의존적이며 3억 명 이상의 인구 대부분이 도시 거주민인 국가에서는, 좋게 보면 순진하고 나쁘게 보자면 파괴적이기까지 한 생각이다. 21-22쪽
이러한 기술은 책의 부제를 '좌우를 넘어 새 시대를 여는 시민 교과서'로 적게 한 듯하다. 좌우를 넘어선다는 말은 쉽지만 그것을 하나의 기술체계로, 실천의 방략으로 제시하는 데는 만만치 않은 정보의 취합과 전문 지식의 동원, 그리고 실천을 통해 얻은 해법이 필요할 터이다. 아울러 좌우의 기계적 균형점을 넘어 대안적 좌파의 기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생각들이다.
"설명력을 갖춘 새롭고 강력한 은유들은 우리가 어떻게 경제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새롭고 놀라운 결론으로 이어진다." -35쪽
"시민정신은 우리가 상호의존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나 포용적이고 다민족으로 구성된 시장 민주주의에서 우리가 사회적 동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가치와 시스템, 기술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 85쪽
저자들이 언급하는 '상호의존성'은 현대 사회가 갖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의 상호의존성은 공존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사실상 평화는 그것을 위해 필요하고 이때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에 비용을 들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상호 유익을 가져다준다. 당연히 자국 이기주의를 넘어선 화해와 공존의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국가 간 분쟁뿐만 아니라 지역 간, 심지어 개인 간에도 평화감수성은 필수 덕목이 되어 가고 있다. 이기려고 하다가 더 많은 비용을 치르는 것보다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분담하고 공존을 모색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평화감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경제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경제 전문가인 저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당연한 귀결이다.
"훌륭한 시민은 이미 폐쇄된 사람들 간의 유대관계를 강화하기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영역 간에 다리를 놓는다. 결합은 신뢰를 집중시키지만 연결은 신뢰를 확산시킨다." - 100~101쪽
"우리는 큰 정부 대 작은 정부에 관한 논쟁은 이만 마무리짓고 무엇 what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 big 정부, 어떻게 how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작은 small 정부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 199쪽
경제를 보는 거시담론인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에 따라 대체로 진보에서는 큰 정부를(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 강화), 보수에서는 작은 정부를(정부는 개입을 최소화, 시장의 자율에 맡김) 지향한다는 일원적 논리를 확장하여 여기에 어떻게 how를 붙여 저자의 주장이 단순 절충 이상임을 밝힌다.
저자는 <Big What, Small How>에 대하여 '어떻게'에 접근하는 몇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1) 지역적으로 생각하고 세계적으로 행동하라. 2) 시민의 만물상이 되어야 한다. 3) 더 똑똑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4) 긍정적인 피드백 루프를 생성하고 강화해야 한다. 5) 다양한 예방책을 제안해야 한다. 6) 더 많은 넛지 Nudge(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를 만들어내야 한다. 7) 더욱 전략적이고 누진적으로 과세해야 한다. 8) 장려책을 마련하고 기대 이상의 실적은 포상해야 한다. 9) 가차 없이 솎아내야 한다.
민주주의의 정원(에릭 리우, 닉 하나우어 지음)
아울러 저자는 Big What, Small How를 '요령 있는 정원사가 일하는 방식'이라 말한다. 정원사는 넝쿨에게 담장을 타도록 시키거나 장미가 저절로 피게 만들 수는 없지만, 채소를 심을지 꽃을 심을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필요한 토마토와 불필요한 잡초 사이에서 무엇이 제대로 자라고 무엇이 잘못 자랐는지 구분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정원사는 자신이 정원을 가꾸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원사는 훌륭한 리더도 아니고 시장 그 자체도 아닌, 사유하고 실천하는 시민이다. 조너선 하이트의 추천의 말은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함축한다.
"사회는 정원과 같다. 이 단순한 은유를 통해 우리는 사회정책의 복잡성과 그 한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 이기적인 소수가 사회를 망치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있다면, 이 엄청난 책을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