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년이 온다>
처음 몇 쪽을 읽고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24쪽)
'그 다른 세상'은 '그녀들과 한조가 된 세상'의 저편에 있는 세상이다. 그 다른 세상은 그녀들과 한조가 된 세상에 앞서 있다. 그리고 그녀들과 한조가 된 세상으로 인해 정지한 세상이다. '그녀들과 한조가 된' 그날부터 생겨난 그 다른 세상의 또 다른 저편,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년 동호가 거역할 수 없는 무서운 꿈에 퍼뜩 눈을 뜨고, 꿈보다 무서운 생시가 동호를 기다리는, 이 이야기는 1980년 오월 광주의 시공간을 그린다.
동호가 그녀들과 한조가 된 것은 운명이었을까? 무심한 삶의 순환이었을까? 아니면 공포와 저항이 교차하는 순간적인 결정이었을까? 이제 막 집어 든 한강의 이야기, <소년이 온다>는 한강 특유의 담담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들과 한조가 되는 찰나의 순간이 가져올 극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은 알겠다. 몸에 새겨진 직관으로. 언제든 광주의 이야기는 진혼의 노래다. 한강이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권력은 그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블랙리스트는, 권력이 내 허락 없이 나를 엿보고, 예술활동을 방해하고, 내 삶을 끊는, 더럽고 비열한 자들이 쓰는,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다. 특별히 문화예술계를 향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에 대한 권력의 저급한 수준을 드러낸, 웃음조차 말라버리게 만드는 희극이자 비극의 권력 놀음이다.
파김치가 돼 쓰러졌던 어젯밤, 그리고 악몽에 시달렸던 긴 밤을 뒤로하고 주말 아침에 집어 든 책,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창비(2014)
동호, 소년
더는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너는 허리를 편다. 어둑한 실내를 둘러보자, 죽은 사람들의 머리맡에서 일렁이는 촛불 하나하나가 고요한 눈동자들처럼 너를 지켜보고 있다. (동호, 12쪽)
일상, 진부한 삶의 순환에 안도하는
그 다른 세상이 계속됐다면 지난주에 너는 중간고사를 봤을 거다. 시험 끝의 일요일이니 오늘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 마당에서 정대와 배드민턴을 쳤을 거다. 지난 일주일이 실감되지 않은 것만큼이나, 그 다른 세상의 시간이 더 이상 실감되지 않는다. (동호, 24쪽)
정대의 죽음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정대, 50쪽)
삶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순간’
동호야, 왜 집에 안 갔어? 장전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던 청년 앞으로 그녀는 끼어들었다. 이 애는 중학생이에요. 집에 보내야 돼요. (김은숙, 90쪽)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 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김은숙, 96쪽)
짧은 장례식과 긴 장례식 사이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연극 대사, 99쪽)
기억과 실존
그리고 배고픔을 기억합니다. 꺼진 눈두덩이에, 이마에, 정수리에, 뒷덜미에 희부연 흡반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던 배고픔. 그것이 서서히 혼을 빨아들여, 거품처럼 허옇게 부풀어 오른 혼이 곧 터뜨려질 것 같던 아득한 순간들을 기억합니다.(살아남은 나, 107쪽)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 그 고통
나는 모릅니다. 왜 김진수는 죽었고, 그와 한조가 되어 함께 밥을 먹었던 나는 아직 살아 있는지. 김진수가 더 많은 고통을 받았을까요. 아니요, 나도 충분히 고통받았습니다. 김진수가 더 잠을 못 잤을까요. 아니요, 나도 잠을 못 잡니다. 하루도 깊이 못 잡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그럴 겁니다... 오늘도 빠짐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죽었고, 아직 나는 살아 있는지. (108쪽)
양심, 기억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114쪽)
생각, 이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120쪽)
아물지 않는 기억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134쪽)
열여섯, 정미
...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모두 모아서 노조 사무실로 갖다 놨대. 꼬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164쪽)
그리고 녹취를 부탁받은 ‘나’의 기억과 동호 엄마의 기억
'나'의 기억과 동호 엄마의 내러티브를 독자 입장에서 기록하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다. 강렬한 서사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이렇듯, 화자와 시공간을 바꾸어 가며 80년 광주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