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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16. 2023

호퍼, 도시의 시간을 박제하다

도시의 낯선 풍경과 객체화한 인간의 표정 사이

에드워드 호퍼를 알게 된 것은 상업광고를 통해서다. 꽤 오래전으로 기억하는데, TV 광고를 보다가 그 분위기에 놀란 적이 있다. 호퍼의 그림을 현실에서 구현한 구조와 배경, 그리고 인물, 건조한 대화로 이루어진 '쓱(SSG)'이라는 광고였다. "이 기묘한 분위기는 뭐지? 정지한 듯한 화면에서 책을 읽듯 몇 마디를 주고받는 광고라니..." 구글링을 해보고서야 이 분위기의 원조를 찾았다.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였다. 미술에는 문외한인 내가 이 사람의 작품을 논하기엔 역부족이다. 다만, 내가 그림을 보고 느낀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호퍼의 그림을 보면 몇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대표작인 <밤샘하는 사람들, 1942>을 보자. 나는 이 그림의 포인트를 '남자의 등'으로 보았다. 그림의 제목으로 보아 일단 시점은 한밤에서 새벽 사이이다. 한 레스토랑에 길게 이어진 바가 있고 직원과 커플인 듯한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가끔 '등이 말을 한다'는 표현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그림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 남자의 등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밤샘하는 사람들(Nighthawks, 1942)


도시인의 '소외'는 물리적으로, 혹은 공간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중 속의 고독' 같은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더라도 화려한 불빛 아래 도시인들이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이 있다. 호퍼는 50여 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간이식당은 호퍼에게 이 작품의 모티브를 선사했다. 한편에선 전쟁 중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도시의 화려함이 있는 상황 속 개인들이 느끼는 고독한 실존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시선 처리가 독특하다. 거의 모든 호퍼의 그림에서 인물들의 시선은 감상자를 향하지 않는다. 제각각 무심하게 보고 싶은 곳을 본다. 그러나 그 느낌 또한 강렬하지 않아서 그저 한 곳을  응시할 뿐이다. 커플인 듯한 남녀와 직원은 주제를 놓고 대화하는 것 같지 않다. 내 생각에 이는 아주 찰나의 순간으로 남녀가 직원에게 질문을 던졌고, 직원은 거의 무신경하게 기계적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한다.


아침 햇살(Morning Sun, 1952)


까뮈가 창조한 인물 뫼르소는 "잘못을 뉘우치는가?"라는 판사의 물음에 "햇빛이 너무 눈부셨다."라고 말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라는 이방인의 첫 문장을 기억하는가. 나는 호퍼의 '아침 햇살(1952)'을 보면서 뫼르소를 떠올렸다. 아침 해는 창문을 통해 사정없이 실내로 들어와 벽에 붙는다. 여인은 침대 위에 앉아 밖을 응시한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혼자 맞는 아침'이라는 점이다. 이 분위기는 고독의 임계점 위에 있다.

호퍼의 그림 속 인물은 하나 같이 정면을 응시하지 않는다. 호퍼는 모델까지 고독한 분위기 속에 객체화시켜 버린다. 일부러 독특함을 배제하려 의도했을까. 여인은 마치 사진 방으로 박제된 형상처럼 무심하다. 쨍하고 맑은 아침에 느끼는 허무를 표현한다. 미국적 풍경을 주조로 깔면서 일상적이되 정적인 느낌은 호퍼의 여러 그림에서 반복하여 나타난다. 호퍼는 빛과 공간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밤샘하는 사람들에서 인공광으로 안팎을 구분했다면 아침 햇살에선 자연광이 실내로 육박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바깥은 움직임 없이 정지한 풍경이다.


한 여인이 호텔에서 혼자 아침을 맞는다는 설정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이 그림을 보는 관찰자의 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관찰자의 시선은 먼저 여인을 보고 벽으로 들어온 강렬한 아침 햇살에 머물다가 이내 인물의 시선을 따라 밖으로 움직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림 속 인물과 관찰자는 호텔 밖 어디인가를 응시한다.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1932)


1932년에 그렸다는 '뉴욕의 방'이다. 대공황 시기이다. 한눈에 '완벽한 타인'을 떠올리게 하는 구도이다. 역시 두 사람 간의 소통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중 남자는 신문에 코를 박고 있다. 신문을 다 보고 나서도 아내에게 눈길을 줄 것 같지 않다. 아내는 피아노 건반 하나를 누른다. 정적의 순간이다. 남자는 직장에 갈 때 입는 옷으로 갖추어 입었다. 재킷만 벗은 상태이다.

한 마디로 남자의 머릿속은 '일'로 가득하다. 한편 여인은 빨간 드레스를 입었다. 여인의 오른쪽 뺨과 무심하게 한 손가락으로 누르는 건반은 외로움을 나타내는 듯하다. 남자 역시 고독하기는 마찬가지. 제각각 고독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지만 이들의 시선이 마주칠 것 같진 않다.

남자의 직업은 1932년 작품이라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대공황 시기에 먹고살만했던 사무직이거나 은행원이거나, 중간 관리자쯤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 안정된 가정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각자 고독을 달래는 처지일 뿐, 화해의 기미가 없다.

호퍼의 그림을 여러 장 보고 있노라면 도리없이 느끼는 공허감이 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도시의 낯선 풍경에 대해 객체화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란 비슷하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도시의 시스템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나는 수많은 역할 중 하나를 담당하지만, 없어져도 바로 대체가 가능한 원자화한 객체이다. 마치 시간을 박제한 듯한 호퍼의 그림을 그저 한동안 바라보는 것으로 고독을 달랠 수밖에 없는 도시인의 처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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