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잠들지 못하는 편이다. 주중에는 직장 근처의 숙소, 주말에는 서울 집에서 잔다. 이런 생활이 3년 째다. 물론 불면으로 시달리던 때보단 지금이 백 배 낫다. 10여 년 전 일시적 시각 소실로 입원했을 때, 새벽 한 시에 깨면 그때부턴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옆 환자에게 불편을 줄까 봐 그렇게 깨어 있는 채로 병원 베드에서 아침 6시까지 견디곤 했다. 다섯 시간짜리 명상이었다고나 할까. 퇴원 후에도 1년 정도 지독한 불면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때 비하면 지금 어쩌다 잠을 설치는 것은 애교 수준이란 얘기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다. 일어나기 전에 꿈을 꾸었다. 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선 사전 정보가 필요한데, 난 '공부하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그때 그런 학교가 있었다. 대학 생활은 더 엉망이었다. 학기마다 학점을 채우지 못해 기말고사 후엔 교수를 찾아가 사정을 한 적도 있었다. 변명을 하자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그 보상 심리로 석박 과정은 결석 한 번 없이 (동기들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모범적으로 공부했다. 만약 고등학교, 대학교 때 공부를 석박 과정만큼 했다면 지금쯤 내 인생이 훨씬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 박사였어?" 이렇게 묻고 싶을 거다. 그렇게 안 보인다고 하시겠지. 세상엔 박사처럼 안 보이는 박사도 많다. 심지어 나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기준으로 4개의 전공을 갖고 있다. 이것도 믿기 힘드실 거다.
마지막 전공을 선택한 지 20년이 지났다. 물어보지 않은 얘기를 잘도 하는구나. 아주 가끔 그런다. 이제 다시 꿈 이야기를 하자. 다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학 시절 쓴 글이 하나 있다. 제목도 '그날 새벽'이네... https://brunch.co.kr/@webtutor/218 (도대체 꿈 이야긴 언제 하는 거냐?)
나는 가끔 고속열차의 창 밖으로 찰나적 과거를 본다
대학 때 워낙 자유인으로 살았던지라 공부는 뒷전이었다. 대학 졸업 후 짧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내 꿈의 주요 레퍼토리는 '재입대', '소총 분실' 두 가지였다. 군 생활도 엉망이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게 꿈을 꿀 때는 참으로 심각하다. 그러므로 꿈을 깨면 안정감을 느꼈다. '아 이게 꿈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러면서.
나이를 먹어 재입대하는 꿈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에 '강의실을 찾아 헤매는 꿈'이 들어섰다. 어떨 땐 학생 입장, 어떨 땐 교사이거나 교수 입장이다. 원인은 명확하다. 대학 때 공부 않고 막살았던 것에 대한 회한과, 교원단체 결성에 가담했다가 해직을 당해 5년간 거리의 교사로 살았던 나쁜 기억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 꽤 오랜만에 '강의실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일층짜리 넓고 긴 형태의 집을 가진 임대인이었다. 모든 바닥은 잘 길든 나무 마루였다. 임대료는 받지 않고, 주로 교육, 시민단체들의 공간으로 내준 것 같다. 어느 공간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어떤 좁은 방은 시민단체의 대표가 낮 동안 사용했다. 그 방에 냉장고가 있어서 열어 보았더니 병우유가 수십 개 들어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싸주셨다. 나는 학생이거나, 가르치는 자이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도시락이 든 가방을 메고 강의실을 찾았다. 여기서부터는 너무 익숙한 전개다. 나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강의실을 찾는다. 때로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고, 내려가는 계단인데 중간이 비어 있는 곳을 만난다. 서커스하듯 그곳을 통과하느라 체력을 소진한다. 대개는 이쯤에서 꿈을 깬다. 계단을 내려오다 발을 헛디뎌 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찌어찌 계단 구간을 통과한 날엔 교실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수강자는 중고생 또는 대학생, 대학원생들이다. 얘들이 너무너무 말을 듣지 않아서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화를 참다가 꿈을 깬다. 그러니 꿈을 깨고 나면 현실에서 그런 것처럼 피곤하다. 내 꿈의 레퍼토리는 이처럼 단순하다. 원인도 비교적 명확하다.
오늘 새벽에 '강의실을 찾아 헤매는 꿈'에선 한 가지가 더 포함됐다. '조력자'가 나타난 것이다. 꿈에서 나는 늦공부를 하는 학생으로 심리학 강의실을 찾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건물 3층에도 2층에도 심리학 강의실은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내 꿈에서 한 층을 옮겨 다니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처럼 힘든 일이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이러다 또 찍히겠네 하는 순간 내 옆에 한 여성이 나타나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었으나 말과 움직임이 꽤 익숙한 것으로 보아 그쪽은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안심이 됐는지 모른다. 그녀는 거침없이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갔다. 우리는 모노레일을 탔다.(어제 본 '정이'의 연장인 거냐...) 그런데 그 안정감이라니... 내가 못 찾고 있는 강의실을 누군가 안내해 준다는 설정이 좋았다. 사실 꿈의 연출자는 나이지만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꿈이잖아... 그렇게 모노레일이 롤러코스터처럼 꼭대기로 향할 즈음에 꿈에서 깼다. 하도 꿈 분위기가 이상해서 기록으로 남긴다. (참, 한가하구나.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