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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Jan 28. 2023

우리편 편향

인간은 왜 계속 편을 가르는가?

우리가 토론을 하면서 갖는 기대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내가 주장하는 바가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내 주장에 자신이 없을 때 상대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으니 상대가 자신을 설득해 주길 바라는 마음, 아니면 더 좋은 제3의 대안을 기대하면서 토론한다. 토론의 결과로 의견의 합치를 이루거나 새로운 대안이 나오거나 또는 계속 평행선을 달리더라도 그 차이를 존중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한다. 애초 이런 정도의 신뢰가 아니라면 토론이란 쓸데없는 말장난이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문제는 기대와 현실이 자주 어긋난다는 것이다.


방송 토론을 보면 '이미 입장을 정한 토론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역할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근거를 끌어오는 일과,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공격하는 일이다. 이 토론의 목적은 명확하다. 이기기 위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는 나와 상대방의 의견 차이를 명확하게 부각하고 내 의견이 최선이고 상대방의 의견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막힘없이 표현하는 자가 '토론을 잘하는 사람'이다. 토론 프로그램을 통하여 시청자의 이해를 돕는 일 따위란 애초부터 없다. 시청자 역시 토론자들의 발언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일에 골몰한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토론의 목적은 상대방을 논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지평의 융합을 위한 것이라 했다. 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상대를 누르는 토론 방식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순간, 세계는 확장한다. 과거는 현재의 중재 속에 미래와 섞이고, 대화의 쌍방은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 머리를 맞댄다. 이를 위해 가다머는 '질문을 던지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한다. 질문은 이해를 심화하는 훌륭한 도구이다.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타자는 질문자요 또한 답변자다. 이로써 나와 상대는 훨씬 풍부한 지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가다머는 왜 이토록 지평의 융합이라는 과제에 매달렸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면서 거의 틀림없이 편을 가르고, 적을 만든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상대를 굴복시켜 영토와 자원을 취한다. 인간들의 세계 역시 정글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다머는 이 생태계를 인간 본위로 회복하기 위한 수단을 '대화'로 보았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논리가 그를 따르는 학도들에게 도움을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여전히 진영논리와 프레임에 갇혀 끝이 없는 싸움판을 지속한다.  


한국의 상황에서 아무 성인을 붙들고 확인해 보면 셋 중 하나다. 진보이거나 보수이거나 중도이거나. 그러나 엄격히 말해 특정 사안을 판단할 때 중도 영역은 없다. 특정 사안의 성격에 따라 선택하거나 배척하는 행위는 진보 혹은 보수적 논리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보와 보수로 나뉜 무리들은 중도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사람의 입장을 확인한 순간 모든 현안 문제에 대한 그 이의 판단을 끝까지 듣지 않더라도 능히 알 수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이른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의제를 좁은 통로에 가두고 만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한국의 정치를 이렇게 말한다. "이쪽 30%, 저쪽 30% 상태에서 나머지를 누가 끌고 오느냐에 따라 승패는 갈린다." 승패가 갈린다라고 결론짓는 전제는 역시 모든 정치 행위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내 편에는 유리하게, 상대에겐 불리하게 프레임을 설정한다. 사실 관계와 옳고 그름은 상관이 없다. 이길 수 있다면 진실 앞에서 눈을 감거나, 덫을 놓아 가두어 버린다. 이로 인해 누가 피해를 볼까. 보통의 시민이다. 앞으로도 별로 개선의 조짐이 없어 보이는 한국 상황의 현실이다.


'정치의 후진성'을 연일 질타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양극단으로 나뉘어 싸우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논리 역시 하나의 '잣대' 위에서 작동한다. 어떤 현상을 판단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잣대'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판단하는 자의 지적 교양, 경험, 그가 속한 집단의 성향이 두루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간의 성향을 결정하는 세계관은 하나의 편향을 만들어내고, 이 편향은 몹시 단단하여 쉬이 깨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론에서 보고 있는 모든 뉴스가 가짜 뉴스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정적들에게서 나온 뉴스만이 가짜 뉴스라고 본다."

사실을 말하면, 우리 모두는 뉴스를 그렇게 보고 있다. <우리편 편향>의 저자 키스 E. 스타노비치는 우리 사회의 고통이 '우리편 편향(myside bias)'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우리편 편향'은 자신의 기존 신념, 견해, 태도에 편향된 방식으로 증거를 평가, 생성하고 가설을 검증하는 현상이다. 저자는 우리편 편향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정치적 분열이라는 재앙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편 편향, 키스 E. 스타노비치 지음

스타노비치는 우리편 편향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지 엘리트의 편향을 피하면서 충돌하는 가치관을 깨닫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라고 충고한다. 아울러 신념은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 인터넷이 부채질하는 모호함에 대한 이해, 원칙을 세우고 확신을 피하기, 관점을 바꿔 보는 능력을 키우기 등을 제시한다.


"우리편 편향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가 어마어마하다. 미국에서, 그리고 다른 수많은 서구 국가에서 정당과 이념은 현대한 부족(tribe)에 상당하는 것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이 부족들이 국가의 인지적 삶을 함부로 다루도록 허용해 왔다."


이 현상이 어찌 미국과 서구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짧은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경과한 한국은 이제 자타공인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경제 제일주의 국가 운영은 사회, 문화 등 다른 영역을 답보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한국은 시민국가로는 일천한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한국 사람들은 예부터 편 가르기의 DNA를 타고났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두 가지 다 관계가 있다고 보는 편이다. 독일에서 들어온 '보이텔스 바흐 협약'이 이 경우를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통독 이전인 1970년대 서독의 정치교육자들은 학생들의 올바른 정치교육을 고민했다. 진보와 보수,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학생들을 위한 일종의 수업지침을 합의한다. 정치 상황을 학생들에게 교육할 때 균형 잡힌 정치적 행위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내용이다. 통일 후에 그 대상이 독일 국민 전체로 확대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원칙으로 작동하고 있다.  


보이텔스 바흐 협약은 정치교육의 원칙으로,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 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독일에서 이 협약은 '좌우 합작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로 들어온 보이텔스 바흐 협약은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민주시민교육의 원칙으로 변했다. 다시 말해 독일에서는 바람직한 정치교육을 위해 좌우가 합작하여 이 원칙을 만들었다면, 이것이 한국에 수입된 이후에는 진보진영이 전유하는 민주시민교육 원리로 변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할 협약이 진보진영에서 추구하는 원리로 소개되면서 보수진영의 경계를 부른 형국이다. 한국의 진영논리가 조금 더 극단적일 수는 있겠지만 스타노비치의 말에 의하면 대표적인 우리편 편향의 예다.  

한마디로 스타노비치는 우리가 행하는 말과 글, 행위 안에서 우리 편일 때는 관대해지고, 상대편일 때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일상화하였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그는 여러 학자들이 수집한 객관적 데이터에 근거하여 이 같은 가설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상세한 데이터를 비교 검증하기 이전이라도 우리는 직관으로 알고 있다. 이미 우리가 비판해 왔던 '진영논리'라는 어휘로 말이다.


"만약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서 정서적 괴리감을 느끼는 이유가 미국 사회*에 관한 사람들의 기본 신념이 크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언론의 사업가적 책략과 정당의 선거 전략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좀 더 호의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 우리편 편향, 키스 E. 스타노비치, 259쪽 





한국 사회로 바꾸어도 의미가 통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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