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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Feb 08. 2023

국수의 맛

길 위의 '진지한' 시간

국수의 맛, 길 위의 맛


2년 반의 세종 생활에서 큰 비중은 '길 위의 시간'에 놓여 있다. 주중 서울 출장은 KTX를 이용했는데, 고속철도를 반복하여 이용하다 보면 시간 개념에 왜곡이 올 때가 있다. 물리적 거리에 비례하여 시간이 소요돼야 생체 리듬이 안정되는 데, KTX를 이용하면 시간을 많이 단축한다. 


물론 시간 절약이 주는 편리함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이동 시간을 확 줄여주면 결국 그로 인해 절약된 시간이 다시 '일'로 들어온다. 그러니 고속열차를 자주 이용하면 한편으론 편리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여유를 일로 채움으로써 삶의 피로감을 높인다.   


주말에는 승용차를 이용하여 서울로 간다. 내려올 때 반찬을 포함하여 옷가지 등을 싣고 와야 하고 올라갈 때도 빈 그릇이나 책 같은 짐이 있어서 차량 이동이 편하다. 서울 집이 서남부권에 있어 열차를 이용하는 것과 시간도 비슷하다. 


고속도로보다는 국도가 포함된 자동차 전용도로로 올라간다. 그게 더 빠르기도 하고 톨게이트 요금을 절약할 수 있다. 보통 주말 밤에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다소 졸리기도 한데, 이 길은 그게 덜 하다. 그런데 다른 중요한 이유도 한 가지 있다. 올라가는 길에 국숫집이 한 곳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딱 시장기가 엄습하는 때이다. 


그 집의 국수는 깊고 은은한 맛이다. 함께 나오는 김치는 아주 시원한, 천상의 맛이다. 김치를 꽤 담가본 경험자로서 김치에 대해 슬쩍 물어보았으나 들어가는 재료와 방법을 잘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판매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재료를 샅샅이 뒤져보진 않았다. 


여기 들어와서 국수를 먹는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무심하게 그냥 국수만 먹는다. 유부를 조금 더 넣는 것 빼고 이곳 국수가 특별한 재료를 쓰는 것 같진 않다. 그럼에도 국물과 면, 그리고 몇 가지 부재료가 합해져 최고의 맛이 난다. '맛'이란 것이 같은 재료에서 다른 맛이 나오게 하는 것이라면, 이 집에서 국수를 삶는 일에 경외심을 표하고 싶을 정도다. 


주말에 집으로 올라가면서 이곳 국숫집을 지날 때 1킬로미터 전부터 시장기가 돈다. 아마도 몸에 새겨진 탓이다. 습관처럼 차를 멈추고 국숫집으로 들어간다. "국수요."라고 하면 알아서 '잔치국수/보통'을 내어주는데 이 집엔 천 원을 더 내고 먹는 곱빼기도 있다. 그리고 정말로 이 집의 비장의 무기인 비빔국수가 있는데, 딱 한 번 먹어 보았는데 흠잡을 때 없는 깔끔한 맛이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국수는 '잔치국수'다. 국물이 주는 편안하고 따뜻한 그 기분 때문에 나는 잔치국수를 먹는다.


장거리 운전하는 분들은 잔치국수 곱빼기를 즐기는 것 같다. 국수를 먹는 시간은 15분 남짓, 나는 진지하다. 젓가락으로 면을 크게 집어 입안 가득히 넣고 식감을 느낀다. 지극히 사소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이 있다. 이어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편안하다. 일주일 동안 쌓인 고단함이 국물에 그대로 녹아버리는 느낌이랄까.


장삼이사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국수를 먹는 동기와 분위기는 편안하게 한 끼를 때우면서도, 라면을 먹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면과 따뜻한 국물을 먹으면서 느끼는 특별한 '위로감'이다. 길 옆에 위치한 국숫집이다 보니 홀로 식사하는 손님이 많다. 나는 맨 끝자리에 벽을 뒤로하고 앉아 먹는 편인데, 그러면 식당 풍경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의도하지 않아도 다른 식객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대체로 차량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올라가는 분들이다. 나와 같은 동기로 이 집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들어온 입구 쪽을 보고 홀로 앉아 국수를 먹는다. 손님의 대부분은 중년 남자들이다. 


나에게는 후루룩 국수 먹는 소리와 남자들의 등이 보인다. 조용히 움직이는 등을 보면서 그들의 고단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등을 보이기 싫어 무의식적으로 맨 뒤에 앉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한 그릇의 국수로 한 주에 쌓인 고단함을 위로받기를. 서로 말은 하지 않지만 그냥 이런 연대감을 잠시 느껴보기도 한다.  


국수는 먹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다. 그 옛날 국수를 먹어야 할 일을 떠올려 보면 국수는 잔치나 상가 등에서 내오던 주된 음식이었다. 잔칫집, 상가에서 서로 경계하는 일이란 없다. 이렇듯 국수는 나와 타자 간의 경계심을 풀고 편안한 시간을 갖게 한다. 


사실 따뜻한 국물을 먹는 경우 대개 다 그렇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하는 내게 국수가 더 그러하다. 육천 원짜리 국수도 이렇듯 나를 위로하는데, 각박한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선 이런 위로가 드물다. 이제 3월부턴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없다. 섭섭한 마음 때문에 더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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