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부재의 시대라고 한다. 시민들은 삶의 지향을 상실하고 자기 생존과 안전에 집중한다. 극단적 자기보호 욕구는 정글 속 적자생존 논리와 다를 바 없는 ‘경합사회’를 만들어 냈다. 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곧 성실한 사회생활로 치환된다. 지식과 정보를 취하는 기준은 당장의 쓸모이다. 당장의 쓸모는 곧 경제적 가치이다. 경제적 가치를 앞세우는 나쁜 실용주의는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다. 먹고사는 문제는 엄중하고도 실존적인 문제이지만 ‘먹고사는 문제에만’ 집중할 때 철학은 설 자리를 잃는다.
철학 부재의 증거는 곳곳에 차고 넘친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 계열의 학과가 대학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나마 철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두꺼운 책을 읽을 시간도, 성의도 없어 유튜브에서 10분짜리 ‘철학 엑기스’를 찾는다. 이는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부른다. 바쁜 현대인은 조각난 지식의 기계적 결합으로 이해를 도모한다. 사색의 기회는 사라지고 일차적 자기생존 욕구만 남는다.
철학의 위기는 곧 교육의 위기이다. ‘가르치는 일’은 세상의 지식을 전수하는 일이지만 그 속에 ‘왜’, ‘무엇을’, ‘어떻게’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내포한다. 그러나 오늘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 하는 학생들은 그것의 의미탐색보다 직업인으로서 신분의 보장과 안정적 급여를 따라가는 경향이 강하다. 현실이 이상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끊임없이 왜곡한다. 혹자는 언제 우리 교육사에서 철학의 시대가 있기는 했었나 라고 반문할 것이다. 교육은 늘 성공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철학적 삶을 살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시대인들의 사색적 삶과 시민적 소양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라고까지 불리는 현재 상황을 극복할 힘은 개인과 집단을 아우르는 시민적 소양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108년 전 듀이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철학 부재의 시대를 맞아 ‘민주주의와 교육’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식교육과 역량교육
듀이의 글은 읽기에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그만큼 편의에 따른 해석이 난무하기도 했다. 듀이에 대한 오해와 오독은 대략 몇 가지 방향에서 이뤄졌다. 교과 지식을 도외시하고 아동의 흥미와 관심에 집중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지식 자체를 다루는 것을 소홀하게 여기며 전달 방법만을 중시했다고 하는 것도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을 교육 목적에 맞게 구조화하자는 듀이의 의견은 한국에서 열린교육을 만나 개방적 공간 정도로만 이해됐다. 역량담론이 한창일 때는 전통적 지식관을 대체할 용도로 듀이를 차용하였다. 나아가 학력 저하의 원인을 학습자 중심 수업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이 같은 오해와 오독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듀이 철학을 단편적, 편의주의적으로 빌린 것에서 비롯하였다.
전통적 지식관은 인식주체의 외부에 객관적인 지식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기억, 상기, 반복, 재현하는 것을 학습의 원리로 보았다. 습관의 마당을 지나야 이성의 궁전에 들어선다는 피터스의 말은 이를 함축한다. 브루너는 각 학문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과 원리를 강조하였다. 전통적 지식관과 실증주의가 결합하니 전통적 지식관은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객관적 지식을 단순 암기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이 관점에서는 공부란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문제를 풀고 또 푸는 과정이며 교사는 학습자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 설명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이 방법은 교육효과를 ‘가시적 성취’로 본다.
결국 계량화한 성적이야말로 학습자가 공부한 경험과 흔적을 알아보는 데 가장 유용한 장치라는 신화가 자리한다. 아울러 학습자의 성취를 집단 내 위치(변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상대평가를 만연하게 하였고, 대학입시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학교 효과보다는 선발효과에 기대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다시, 줄 세우기 사회인 한국에서는 줄 세우는 방법의 공정성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것을 비교육적이라고 본 또 다른 관점에서 역량 개념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듀이가 그렇게도 증오했던 ‘하나의 극단이 또 다른 극단을 부르는’ 형국이다.
역량에는 인지역량, 사회·정서역량, 행동역량 등의 범주가 있다. 그런데도 극단적 역량주의자들은 단순 반복 암기식 전통적 지식 전수를 극복해야 한다면서 교수학습의 주도권을 학생에게 넘기고, 교사는 안내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정한 역량은 엄연히 지식의 탐구와 해석 및 전이를 포함하는 인지역량을 앞세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왜곡된 역량주의 담론에 맞서 ‘일곱 가지 교육미신(데이지 크리스토둘루. 2018)’ 류의 주장이 역량교육을 학생 주도 수업이라면서 비판한다.
다시 정리하면 지식교육은 사실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 그리고 태도와 가치를 다룬다. 역량교육은 인지, 사회·정서, 행동역량을 포함한다. 교집합이 많은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속성 때문이다. 그런데도 양극단의 담론은 서로 상대의 극단적 측면만을 부각하면서 화해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
‘일곱 가지 교육미신’은 한국에서도 많이 읽혔는데 미신의 구체적 사례로 지식보다 역량이 중요하다는 것,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라는 것,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전이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 프로젝트와 체험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라는 것,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교육이라는 것을 들었다. 지식교육이 암기와 반복에 치우친다고 비판하면서 교수학습의 권리를 학습자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극단적 역량담론이 자라났는데, 다시 이를 미신으로 돌리는 극단적이고 완고한 지식교육론을 불러오는 등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듀이가 학습의 내용이 아동의 흥미와 관심에 닿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배경은 삶과 유리되지 않은 학습을 강조하면서 나온 말이지, 아동의 흥미와 관심만을 쫓아가자는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듀이를 읽었다고 하는 분들도 너무 쉽게 지식과 경험을, 아는 것과 하는 것을, 교사와 학생을,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을 대비시키면서 오히려 듀이에 대한 편협한 이해를 부추겼다.
상당수의 독자가 오해하거나 오독할 만한 배경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듀이는 이러한 극단적이고 기계적인 이원론이 구성원의 다양한 관심사를 담아 민주적 사회를 이뤄야 하는 과제를 방해한다고 일갈하였다. 듀이가 민주주의와 교육을 집필했던 1916년이나 그로부터 10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헛담론이 지속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읽는 민주주의와교육(존 듀이, 1916, 심성보역)
대전환의 시대 시민의 복원
최근 들어 전문가들은 제각각 특별한 필요에 따라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최근 크게 부상하고 있는 관점으로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학습자는 미래사회를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을 만큼 인류사적 담론인가 하는 점은 별개로 하더라도 첨단기술은 인간의 삶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학교는 빠르게 기술진화에 적응하면서 ‘미래인재 양성소’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위기가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고 하면서 지속가능발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있다. 학교는 생태 공간이고 학생들은 생태전환교육을 통해 생태문명을 일구어갈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환의 논리가 있다. 그것은 현재 상태를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보면서 시민성과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건강한 사회는 각 구성원이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책임 있게 참여하는 민주적 공동체이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는 각 구성원이 지력을 발달시키면서 서로의 이해를 조정·중재하는 방법을 체험하는 민주시민의 공간이다. 그러나 압축적 고도성장과 길지 않은 민주화의 과정을 밟아 왔던 우리 사정을 보면 민주주의는 권리주장의 방편이고, 사회는 이해충돌의 장이며, 불이익을 피해 자기 생존을 극대화하는 원자화한 개인만 있을 뿐이다.
민주적 절차와 제도는 완비가 되어 있지만 그것을 건강하게 가꾸어 갈 시민적 소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형국이다. 학교에서는 종종 교육적 해결이 필요한 사안도 법의 힘을 빌리게 되었으며, 학부모는 내 자식 지상주의에 빠져 행여라도 불이익을 받을까 전전긍긍하는 비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도의 퇴행도 있지만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민들의 좌절에서 비롯한다. 내가 공동체에 적절하게 기여하고 있지 못하다는 효능감의 저하는 집단 무기력을 가져오고 이로 인한 시민의 실종을 우려하게 한다.
효능감이 충만한 시민, 그리고 구조와 토대를 연결하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통해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지속가능성이 있다. 듀이의 말로 표현하면, 민주적 사회의 사회 구성원은 공동의 관심사를 갖고 자유롭게 상호작용해야 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상황에서 지속적인 재적응을 해야 한다. 나아가 듀이는 ‘교육의 민주적 이상이 우리의 공교육 체제를 점차 지배해 가는 특징이 되지 못한다면 민주적 교육의 이상은 비극적 환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듀이는 자주 사회 현상을 연속성 대 이원론으로 대비하였다. 즉 민주주의와 교육을 집필할 당시에도 사회 구성원 내부의 구분과 분리 또는 대립이 만연해 있다고 보았고 빈부, 성별,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는 장벽이 단단하고 견고했다는 것이다. 듀이는 이 장벽이 각 개인과 집단 사이의 자유로운 교섭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 가치도 표준도 제각각일 때 이런 사회에서 나오는 철학은 이원론적 성격을 띤다. 근육을 움직여 일하는 사람들과 경제적 압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한 채 교류하지 않는 것은 이원론적 성격을 더욱 심화한다.
앞서 전문가들은 제각각 다른 필요에 따라 대전환을 주장한다고 하였다. 듀이에 따르면 대전환이든 사회개혁이든 이에 앞서 민주적 사회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와 상호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우선이다. 특히 위기에 빠진 학교의 기능을 학교답게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해충돌의 각축을 넘어 나와 타자의 삶과 생명의 연속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듀이에 따르면 이것이 살아 있는 유기체의 요구에 끊임없이 재적응하는 방법이다. 이를 한나 아렌트의 탄생성과 연결 지은 발제자의 탐색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회는 민주화되었지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이 여전히 모호하다. 극단적 자기보호 논리는 때로 절차를 무시하면서 공동체를 파괴한다. 아렌트가 말한 타자에 대한 존중과 포용은 자기 말과 행위로 세계를 창조적으로 경신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는 듀이가 성장을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 과정이라고 한 말에 생명감을 더하고 있다.
듀이의 논리로 정리하면, ’대전환‘이 교육 혹은 교육자에게만 주어지는 과제가 아니라 사회가 민주적 공동체로 기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의 충족이 우선이다.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가 학교답게 작동하기 위해선 사회의 건강성이 먼저이고, 사회의 각 구성원은 효능감을 가지고 적극적인 상호교류를 통해 목표를 달성하는 공동 경험을 연속적으로 쌓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의견이 다를 때 토론을 통하여 어느 한쪽으로 정리하는 것도 좋겠지만, 더 좋은 결말은 합의의 지점을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지평의 융합을 꾀하는 것이 좋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진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서로의 선입견을 해체하고 재구성해가는 과정에 대한 가다머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물론 마사 누스바움이 강조하는 서사적 상상력의 강조 역시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고 연민하면서 그(그녀)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시민의 복원을 위한 좋은 접근이 될 수 있다. 아렌트와 가다머, 나딩스와 누스바움의 제안은 이원론을 극복하고 사회의 민주적 건강성을 회복하고자 했던 듀이의 후속 버전이라 할만하다.
다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오면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시민성의 한계로 인해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 자유 개념이 왜곡되고, 자기생존 논리는 그 어떤 주장보다 앞서며,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않는 극단적 이기주의, 점점 요원해지는 불평등과 격차 해소, 학교의 교육적 기능에 대한 위협, 공동체 정신의 훼손 등을 어떻게 치유하고 극복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결국 공정한 경쟁을 위해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룰을 만들어 격차와 훼손을 정당화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 집단적인 시민적 소양의 함양과 이를 위한 문화적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다.
맺으며
처음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읽기 시작했을 때 듀이 특유의 문장 전개 방식과 내용의 난해함으로 인해 몇 번을 중단했다. 그러나 한 번 읽고, 두 번째 읽을 때 조금씩 이나마 지적 자극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이 우리 교육의 문제와 그 해결 방법을 모색할 때 가장 강력한 설명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습과 교과, 지식과 방법, 학교와 사회, 이론과 실천을 넘나드는 종합적 교육학 입문서로써 독자에게 팽팽한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원저자와는 다른 입장에서 이론을 전개하는 학자에 의해 번역된 글과 주석은 때로 이해를 방해하였다.
이번에 심성보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책에서는 한국적 맥락, 민주주의 교육의 연계,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 변화와 혁신에 대한 번역자의 문제의식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실종하고 있는 ‘시민’을 복원하기 위해 이 책이 널리 읽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