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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May 09. 2024

도시와 역에 관한 짧은 잡담

언어는 유한하고 시간은 덧없이 흐른다

사흘 내리 비가 오다 그친 어제 짧은 기차 여행을 했다. 여행이랄 것도 없다. 기차를 탄 시간이 왕복 두 시간 남짓이라. 그냥 기분을 그렇게 내고 싶었다는 거지. 목적지는 내가 2년 반 동안 생활했던 도시다. 시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못하고 내려갔다가 점심도 못 먹고 의뢰한 서류만 받아 들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아침, 점심, 저녁때만 반짝하고 붐비는 그 도시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동네에서 가장 시끌벅적하다는 동네 역시 오전 시간엔 성실하게 한가롭다. 먹고 마시고, 그러다 탈이 난 사람들 고쳐주는 클리닉이 즐비한 곳.

아직도 관공서가 들어설 자리가 공사를 기다리고 있고, 중앙 청사 근처로 밀도와 높이를 자랑하는 멋없는 건물들, 그리고 필요하면 바로 탈 수 있다는 BRT 정류장까지... 뭔가 앞으로 시간이 많이 흐르더라도 개성 있는 도시로 성장할 것 같지 않은 어중간한 곳. BRT에서 내려 볼 일 보고 바로 돌아오는 길에 느낀 감상은 처음 이 도시에 발을 들였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2년 반 동안 생활했던 도시


이곳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처음 일 년 동안은 정부 청사 바로 옆에 숙소(나중에 알고 보니 교육부 기숙사라는 별칭을 가진 곳)를 정했다가 호숫가를 걷는 것  빼고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비음주자에게는 더욱)... 나중 일 년 반은 강 아래 동네로 이사를 했었다.


그러나 호숫가를 걷던 것에서 강변을 걷는 것으로 바뀐 것 말고는 달라질 일상이 없었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던 2년 반 동안 오로지 일로 심신을 소모한 도시였다. 어쩌면 재미에 비해 책임이 중했던 일 때문에 막상 한두 시간 여유 시간이 생겨도 고작 걷는 것 밖에 하지 못한 나의 라이프 스타일에도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비 갠 후 높고 파란 하늘 보는 것으로 조금은 중화를 시켰다.  


오송역으로 돌아오는 BRT 풍경은 한결같다. 공무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타고 내린다. 모두 낯선 얼굴임에도 한편으론 친숙하다. 이 느낌은 KTX 플랫폼에 오르자 극대화한다. 하나 같이 검은색 수트에 흰 셔츠, 타이를 매고 휴대폰에 고개를 박고 있거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 중앙 부처 공무원들이다.


여전한 BRT 정류장

기차를 기다리는 십 여 분, 2년 반 동안 '내가 저랬었지'라고 연신 중얼거리며 관음증에 걸린 놈처럼 훔쳐보았다. 대체로 실국장급 고위 공무원들은 수트에 타이까지 차려입었다. 그렇게 갖추어 입었을 때 역설적으로 옷 걱정을 안 했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거든. 오로지 매일 갈아입을 셔츠만 다려 놓으면 됐으니까.


하나 같이 피곤에 찌든 사람들은 기차에 오르자마자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업무 지시를 하거나 받는다. 서울에 올라가서 보고할 문서를 한 번 더 훑기도 한다. 나름 자유를 찾았다고 하는 지금 내 입장에서 그들을 보니 연신 뜻 모를 웃음이 나온다.  오죽하면 '길국장'이라 했겠나. 업무의 상당 부분을 길 위에서 처리한다는 뜻이다.


중앙 부처는 상당 부분 옮겨갔으나 여전히 최고 권력자가 있는 곳, 법을 만드는 곳은 서울에 있으니 생겨난 오랜 풍경이다. 그 많은 공무원들이 길 위에 뿌리는 시간만 아니어도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자주 했었다.

플랫폼


여유를 찾은 지금의 나는 그들이 '좀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자 초점 잃은 눈으로 익숙하게 몸을 움직여 출입문으로 일제히 들어가는 행렬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관절을 따라가는 살아 있지 않은 육체 말이다.


돌아오는 길엔 용산역에 내렸는데 여기는 또 신세계다. 전국의 큰 역들 대략 가 보았지만 용산역은 요즘 말로 '힙한' 것 천지다. 먹을 것, 입을 것이 넘쳐 젊은이들이 다 이곳으로 오는 느낌이다. 4층에서 7층까지 온통 먹거리인데, 입 짧은 나도 한 군데 찾아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다. 7층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탔다.


언어는 유한하고 시간은 덧없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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