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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ug 12. 2024

육아노동에 관한 5 가지 에피소드

<장면 #1>


큰 아이가 어렸을 때 육아노동은 지 않았다. 그런데 울고 보채던 아이도 조용히 집중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TV에서 광고가 나올 때였다. 사악한 아빠는 그것을 활용했다. 광고가 나올 때마다 TV 앞에 앉혀 놓으면 평화가 찾아왔다. 나중에는 소리만 듣고도 자동으로 반응했다. 그것 때문에 아이가 자극에 둔감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 TV를 보니 모든 방송을 광고처럼 한다. 프로그램은 너무 시끄러운데 행여 집중이 분산될까 봐 큰 글씨로 연신 자막을 띄운다.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으면 시청자를 잡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장면 #2>


오래전 얘기다. 사무실에서만 쓰던 PC를 집에도 한 대 들여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모뎀을 통하여 인터넷에 연결될 때 삐~ 뚜~ 하는 소리는 정보의 바다로 연결하는 메시아의 음향이었다. 나는 육아노동의 효율성을 기한다는 미명 아래 큰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들은 모니터 속 신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나쁜 육아였다. 어느 날 아들은 키보드 위에 실례를 해 놓고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판 사이의 오물을 닦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 아들은 인공지능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데 모르겠다. 나쁜 교육의 영향인지.


<장면 #3>


둘째가 태어나고 네 식구가 됐을 때(아마도 큰 아이 다섯 살, 작은 아이 세 살이었을 거다.) 대천 바닷가로 놀러 갔다. 내가 큰 아이를 안아 물가로 데리고 가서 내 던졌다. 나로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이 아이의 적응력과 모험심을 키워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는 사후 의미 부여이고 그냥 놀려주고 싶었다. 그랬더니 아들은 숙소 쪽으로 울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물속에 내던지는 아빠가 어디 있냐?"라고 절규했다. 새 며느리가 그 얘기를 아들에게 들었다고 전한다. 확실히 나쁜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장면 #4>


아들이 고3 때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승용차로 데려오곤 했다. 나도 아들도 졸린 시간이었다. 내가 10대-20대 때 하드락을 즐겨 듣던 입장이라 졸음도 날릴 겸 카 오디오로 하드락을 들었다. 주로 딥퍼플의 에이프릴이나 스모크 온 더 워터, 차일드 인 타임, 하이웨이 스타 같은 곡들이었다. 간간히 볼륨을 높여 핑크 플로이드 같은 프로그레시브 락도 들었다. 학습 노동에 시달린 고3 아들놈은 시끄럽다 말할 기운도 없었는지 시트에 몸을 묻고 잠을 잤다.


이 놈이 수능 직후 일렉기타를 사서 뚱땅 거리더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노래패에 들어가 기타 연주자가 되었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노래패에 복귀하여 만난 여성이 지금의 며느리다. 무려 9년 동안 사귀더니 올봄에 결혼했다. 볼 때마다 아들보단 며느리가 낫다. 아들은 결혼을 잘했다. 인과관계는 명확하다. 내가 젊은 시절 하드락을 즐겼고, 아들에게도 듣게 했고, 아들은 일렉기타를 사서 노래패에 들어갔고, 그리고 자기 짝을 만났다. 이것은 '나비효과'다.  


<장면 #5>


어제 아들 내외가 다녀갔다. 여의도에 있는 지리산 산나물 정식집에 가서 식사를 하였다. 식구들 모두 만족한 식사였다. 미각이 돌아오기 시작한 나도 오랜만에 음식 맛을 느꼈다. 집에 돌아와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과일을 먹는데 며느리가 아들의 행각을 머라 머라 고발한다. 이제 AS 기간은 끝났고, 리콜도 받지 않는다고 했다. 며느리는 곧 수용했다. 아들은 집으로 가면서 가방을 두고 갔다. 오늘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데 말이다. 배우자와 함께 아들 집까지 가서 전해주었다. 젊은 놈이 벌써 건망증이 심하다. 어렸을 때 아비의 나쁜 육아 때문일지 모르겠다.  


이 모든 풍경에 대하여 조너선 하이트가 쓴 <나쁜 교육>과 <불안세대>는 각종 데이터에 근거하여 명쾌하게 설명한다. 다음에 그 얘기 한 번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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