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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Aug 03. 2024

정년 -27일, 지각하는 몸을 상상하다

일주일 중 이틀 정도는 조급함이 앞서고 나머지는 그저 대충 살아진다

어제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퇴직급여(연금, 일시금) 및 퇴직수당 사전 신청에 대한 안내였다. 얼마 전에 듣기를, 8월 말 정년 기준일은 8월 30일 12시, 즉 8월 31일 0시까지라고 한다. 8월의 마지막 날인 31일 0시부터 자정까지는 공직자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부터 정확히 27일 더 공직자로서 신분을 더 유지할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공직생활을 마감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현직에서 업무를 하다가 정년을 맞고 싶다는 작은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휴직 상태에서 정년 퇴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부서에서 간단하게 절차를 갖자는 연락을 받았으나 그러지 말자고 했다. 이미 2월 말에 송별회 겸 고별 강연까지 한 마당에 다시 구성원들을 번거롭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걸어왔어야 하는 걸 달려오느라 힘들었다


1985년 교사로 발령을 받은 이래 4년 반의 해직 기간과 2년 간의 공부 휴직을 제외하면 이렇듯 길게 쉰 적이 없었다. 5개월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에 아들은 결혼을 했고, 나는 두 번의 수술과 한 번의 시술을 했다. 지금은 회복과 재활에 전념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과는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다. 아주 서서히 회복되고 있음을 느낀다.


뇌종양 수술 직후 의료진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시신경 손상과 인지 기능이었다.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니 뭐가 보이냐, 사물이 두 개로 보이냐, 좁게 보이냐, 손가락을 펴 눈앞에 대고 하나냐 둘이냐를 반복하여 물었다. 이상 없이 보이길래 그대로 말했더니 주치의도 간호사도 그러면 됐다고 안심했다. 두 번째로는 인지기능이었는데, 사실 나는 마취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의식이 또렷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너무 또렷해서 더 고통스러웠다고나 할까.


준중환자실에서 하루를 있었는데 뇌척수액이 흐르지 않도록 베드를 높여 자세를 고정했고, 코는 막아 놓은 상태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입으로만 숨을 쉬었으며(입이 말라죽는 줄... 모든 뇌수술 환자들이 이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 자력 배뇨를 못하니 소변줄을 끼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정신이 말짱하니 옆 베드 환자들의 고통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아직 목소리가 완전하게 돌아오지 않았고, 코도 제 기능을 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비강 쪽 천공된 것이 아물면서 콧등이 조금 내려앉을 수도 있다고 닥터께서 말씀하셨다. 나 스스로 인물을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우람한 코와 중후한 목소리는 타의 모범이 되었거늘, 이젠 볼품이 없다는 사실이 마냥 슬플 뿐이다.  


혈압/혈당 때문에 매 식후에는 무조건 집 주변을 걸어야 한다. 담체관에 스텐트를 삽입하고 있어 복부에 힘주는 운동은 못하고, 앞으로 숙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10월에 제거해 준다고 하는데, 상황이 안 좋으면 갈아 끼운다고 한다.


SNS에 글을 쓰면 벗들은 대뜸, "많이 회복되셨군요. 다행입니다."이런 반응을 보이시는데, 글쓰기야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손가락 두 개만 움직일 수 있으면 쓰는 것 아닌가. 아무튼 정년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육신의 회복과 함께 정년 이후 삶을 설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가 있다.


가볍게 글을 쓰고 있지만, 점점 더 글을 쓸 수 있는 범위와 주제는 제한되는 듯하다. 학교 현장을 떠난 지 10년이 됐으니 교육에 대해 자꾸 말을 보태는 것도 두렵다. 그 사이 변화의 폭이 훨씬 크다는 점도 교육 글쓰기에 대한 망설임으로 작용한다. 책을 오래 읽는 것이 힘들긴 한데, 독서의 범위를 의식적으로 넓히고 있다. 제2 인생을 설계하는데 큰 시험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헤밍웨이, 스티븐 킹, 루카스의 글쓰기 책을 놓고 한참 뒤적거렸다. 세 작가의 말을 종합하면 글쓰기는 발견되고, 유혹하며, 마침내 하나의 스타일로 완성된다. 정년 후 삶에 대한 설계를 두고 말하자면, 일주일 중 이틀 정도는 조급함이 앞선다. 나머지는 그저 대충 살아진다. 비록 육신의 회복이 정신의 또렷함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나는 '지각'하는 '몸'을 말했던 메를리 퐁티의 주장을 따라가는 편이다.



루카스, 스티븐 킹, 헤밍웨이의 글쓰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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