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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실밖 Oct 21. 2024

소라의 겨울(1)

늦가을 빛이 날 선 칼처럼 방바닥에 꽂혔다

  이층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은 거의 한낮이었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며칠 째 늦잠을 잤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낯선 방, 낯선 벽이 몸 전체로 압박해 들어왔다. 창문에 걸린 커튼의 좁은 틈 사이로 늦가을 빛이 날 선 칼처럼 방바닥에 꽂혔다. 침대 시트를 들추자 먼지가 일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먼지를 머금은 칼 모양의 빛은 더욱 도드라졌다. 소라는 침대에 달린 철제 사다리를 밟고 아래로 내려왔다.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야윈 몸이 휘청거렸다.

  소라는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내가 여기에 며칠이나 있었지? 앞으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나. 오래 있어도 되는 곳인가?' 잠시 짧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소라는 지난 일 년 동안 자기에게 닥쳤던 일을 생각했다. 지난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한기를 느낀 소라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소라는 며칠 전에 이곳 청소년 쉼터로 들어왔다. 구청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는 이곳에서 며칠 생활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자고 하였다. 그리고 매일 퇴근 전에 전화해서 상황을 물었다. 지내기엔 어떤지, 밥은 챙겨 먹었는지, 새로운 친구를 만났는지, 학교에 다시 갈 준비가 되었는지, 물어보는 순서도 비슷했다. 소라는 건성건성 대답했다. 자신도 지내기에 어떤지 잘 몰랐다.

  늦게 일어나 아침 식사를 거르고,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며 점심 이후에는 누워서 휴대폰을 보았다. 저녁 후에도 무기력하게 있다가 잠을 자거나 휴대폰을 보았다. '학교에 갈 준비? 내가 학교에 다녔었나. 다닌다면 전에 다니던 그 학교로 가는 건가'와 같은 생각은 잠깐씩 했지만 내일 무슨 일이 있을지, 무엇이 먹고 싶은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한 가지도 정리할 수 없었다. 소라는 왼쪽 손목에 있는 흉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라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천장을 보고 누웠다. 누운 채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푸근한 얼굴, 집안 살림의 냄새, 웃을 때마다 보이던 잇몸까지도.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소라는 작년에 지영의 휴대폰 번호를 차단했다. 모든 SNS에서 지영을 차단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스타그램 계정도 없애버렸다. 지영이는 나에게 연락을 할 수 없을 거야. 언제라도 내가 차단을 풀면 연락이 닿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얼마나 길어질지 나도 알 수 없어. 하지만 참기 힘들 정도로 네가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야.

  나중에 이 모든 이야기를 네게 들려줄 날이 올까. 아마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몰라. 지영이는 상헌이를 계속 만나고 있겠지.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니 자주 못 만날 수도 있어. 지수와 지동이도 잘 있을까. 지영이 엄마는 여전히 해맑게 웃고 다닐 거야. 소라는 휴대폰의 메모장 앱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영아 나 소라야'까지 쓰고는 눈물이 터졌다. 언제부터인가 울 때 힘이 많이 들었다. 눈물이 솟구칠 때마다 배가 땅기고 속이 쓰려왔다.

  조금 진정되자 소라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휴대폰의 작은 자판을 눌러 메모장 앱에 편지를 썼다.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지금 쓰는 편지를 어떻게 지영이에게 보낼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영 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냥 쓰는 거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지금 견디기 힘들거든. 화면 속 작은 커서가 깜빡거리며 입력을 재촉했다. 소라는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모를 긴 호흡을 하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 지영아. 나 소라야. 점심시간이 끝나가네. 점심은 맛있게 먹었니? 중학교 때 네가 점심을 먹다가 나에게 말했어. 아이들이 급식으로 주는 김치를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버리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다 모아서 집으로 가져가면 반찬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이렇게 말하며 너는 웃곤 했어. 그리고는 식판을 남김없이 비웠지. 너는 점심 먹을 때마다 나를 나무랐어.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네 동생에게 하듯이 가르치려 들었지. 공부를 못하던 네가 음식 남기는 것엔 민감했어.


  오늘 하루만 봐달라고 너에게 졸랐지. 그러면 너는 내 식판의 밥과 반찬까지 네 식판으로 옮겨서 다 먹었어. 나는 "이렇게 먹고 수업시간엔 맨날 잠을 자는 데 살도 별로 찌지 않는 걸 보면 참 이상도 하지."라면서 너를 놀렸어. 너는 두 동생과 엄마까지 보살피려니 먹은 것보다 나가는 에너지가 훨씬 많아서 그랬을 거야. 지영아. 오늘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 미치도록 보고 싶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봐.

  지영아. 미안해.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졌고, 전화도 안 되고, 카톡이든 인스타든 연락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나를 발견할 수 없었을 거야. 만약 네가 그랬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찾아내서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거야. 지영아. 어디서부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우리 사이엔 중학교 때까지 어떤 비밀도 없었잖아. 내가 너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화가 나. 그래서 더 연락을 할 수 없었어. 나는 두려워. 나중에 혹시 우리가 다시 만난다 해도 옛날처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만날 수는 있을까.




  소라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자판을 눌렀다. 여기까지 쓰고는 소라는 주먹을 쥐고 양쪽 어깨를 두드렸다.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 빛이 길어지고 있었다. 맞은편에도 이층 침대가 있었다. 이 방에는 소라 말고도 두 명의 여자 아이가 생활했다. 지금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둘 다 밖으로 나간 것 같다. 그 아이들은 매일 외출을 하는 것 같았다. 점심 후에 나가서 저녁 전에 들어왔다. 어떤 날은 밤늦게 들어왔다. 둘은 방바닥에 앉아 그날 밖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했다. 처음에 소라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소라가 제대로 답을 하지 않으니 그들도 이제 포기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둘은 소라가 이 방에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 지영아 우리 아빠라는 사람이 엄마를 자주 때린 것은 알지? 술만 먹으면 엄마를 때렸어. 아빠가 하던 일이 잘 안 풀렸고, 빚을 많이 져서 매일 빚쟁이들이 집에 들어오고, 집과 세간에 빨간딱지가 붙고 하던 것은 너도 같이 본 적이 있어서 잘 알 거야. 집에 찾아온 빚쟁이들은 처음에는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보라고 졸랐어. 엄마에게도 구경만 하고 있지 말고 나가서 구해오라고 했지. 그게 안 통하자 그 사람들이 무서운 말을 했어. 장기라도 팔라고.


  어떤 날은 여기 연락해 보라고 하면서 알 수 없는 연락처를 아빠 주머니에 쑤셔 놓고 가기도 했어.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빚쟁이들이 나가면 그때부턴 아빠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세간을 부수고 엄마를 때렸어. 그리고는 내 몸에도 손을 댔어. 나 보고도 막 욕을 하면서 '이년아 어디 가서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와. 니 애비 죽는 꼴 봐야겠니? 얼굴은 반반한 년이 도무지 수완이 없어!'라고 소리쳤어. 난 무서웠어. 정말 내가 어디 가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집을 나오고 싶었어. 근데 그때 우린 아직 중학생이었잖아.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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