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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학점제, 안착할 수 있을까?

전직 정책 담당자의 사과와 변명, 그리고 대안의 모색

by 교실밖

나는 2020년 9월부터 교육부에서 일했다. 2년 동안 교육과정정책관이라는 중책을 맡아 국가의 교육정책을 추진했던 시간은 내게 큰 의미이자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으로 남아있다. 당시 나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이 교육과정의 핵심 과제 중 하나였던 '고교학점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이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개개인의 흥미와 적성에 따라 자유롭게 과목을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한 과목에 대해 학점을 취득하여 졸업하는 제도이다. 이미 서울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개방연합형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시도가 있었고, 이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고 학습 경험을 다양화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당시 고교학점제가 우리 교육을 획일적인 틀에서 벗어나 학생 중심의 맞춤형 교육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책 추진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여러 조건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선 고교학점제는 2025년부터 일반고로 전환하기로 예정되었던 자율형 사립고와 외국어고등학교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결정과 맞닥뜨렸다. 고교학점제가 수직적인 서열화 구조에서 벗어나 학교 간, 학생 간의 수평적인 다양성을 추구하는 제도임을 생각할 때, 특권학교의 존재는 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였다. 모든 고등학교가 학생들에게 다양한 과목 선택권을 제공하고 각자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특정 유형의 학교가 입시 위주의 경쟁 구도를 유지하는 것은 제도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심화시켰다.


또한, 고교학점제는 대학입시의 획기적 개선을 전제로 추진되었다. 학생들이 흥미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심화 학습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입시 또한 기존의 수능 성적 중심 선발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다양한 학습 경험과 성취를 폭넓게 평가하는 방식으로 변화해야 했다. 그러나 정부가 바뀐 후 발표된 2028 대입제도 개편안은 고교학점제가 요구하는 수준의 전면적인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미미한 개정에 그쳤다. 수능의 자격고사화나 전면적인 절대평가 도입과 같은 근본적인 변화 대신, 여전히 상대평가 성적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 구조가 유지되었다. 이는 고교학점제 추진의 가장 강력한 동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고등학교 성취평가제는 고교학점제의 핵심 요소 중 하나였다. 상대평가의 틀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절대적인 학업 성취 수준을 평가하고, 이를 통해 경쟁보다는 학습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 역시 9등급 체제에서 5등급 체제로 완화되었을 뿐, 여전히 상대평가 체제가 유지되면서 학생들은 여전히 등급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학생들이 흥미로운 과목보다는 내신 성적을 잘 받기 쉬운 과목으로 몰리게 만들고, 고교학점제의 근본 취지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고교학점제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들이 후퇴하거나 충족되지 못하면서, 제도의 추진력은 약화되었고 현장의 우려와 혼란은 커져갔다. 여기에 더하여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교원 정원의 감축 문제는 고교학점제 추진을 더욱 어려운 조건으로 몰아넣었다.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교원 확보가 필수적인데, 오히려 교원 수가 줄면서 한 명의 교원이 여러 과목을 지도해야 하는 '다과목 지도' 문제가 발생했고, 학생들의 다양한 수업 시간표에 따른 출석 처리 문제 등 실무적인 문제들이 속출했다. 이는 고스란히 현장 교원들의 업무 부담으로 이어졌고, 정책 추진에 대한 현장의 원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어려움을 호소하고,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깊은 자책감에 시달렸다. 비록 내가 모든 조건을 통제할 수는 없었지만, 한때 이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현재 고교학점제가 처한 난맥상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기대와 달리 혼란을 겪고 있는 학생, 학부모, 그리고 무엇보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장 교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충분한 준비와 전제 조건 확보 없이 제도를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는지, 현장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였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이미 현업에서 물러나 정년을 맞은 사람의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피해 간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교육개혁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정치의 계절을 맞아 어떻게든 개선책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미 상당 부분 추진된 제도를 전면 폐지하고 과거의 교육과정으로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었고, 사회적 비용 또한 막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조건에서 고교학점제가 당초 목표했던 교육의 변화를 제대로 이끌어내며 순조롭게 안착할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장의 피로감은 극에 달해 있고,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정한 조건이 전제된다면' 고교학점제가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획일적인 경쟁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 개개인의 잠재력을 발현시키는 교육으로의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따라서 현재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애초에 계획되었던 필수적인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향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면, 고교학점제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반드시, 그리고 충실하게 지원해야 한다.


첫째, 고교학점제의 취지에 맞도록 대입 제도를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 입시의 종속 변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다양한 선택과 학습 과정을 실질적으로 평가에 반영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절대평가 도입을 통해 내신 경쟁의 부담을 완화하고, 수능을 자격고사화하여 대입이 고교 교육과정을 왜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둘째, 고등학교체제와 관련하여 수직적인 서열화를 완화하고 수평적인 다양화를 추구해야 한다. 자사고와 외고를 애초 계획대로 일반고로 전환하여 모든 고등학교가 학생들에게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교 간 불필요한 경쟁 대신, 각 학교가 특색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상생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교원 정원을 충분히 유지하고 확대하여 현장의 부담을 경감해야 한다. 학령인구 감소를 이유로 교원 수를 기계적으로 줄이는 것은 고교학점제에 역행하는 처사이다. 다양한 과목 개설을 위한 전문 교원 확보, 학생 맞춤형 지도를 위한 충분한 교원 수, 그리고 행정 업무 경감을 통해 교원들이 수업과 학생 지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넷째, 각 시도의 온라인 학교를 활성화하여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학교 규모나 지역적 한계로 개설하기 어려운 과목들에 대한 학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양질의 온라인 교육 과정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학습 만족도를 높이고, 지역 간 교육 격차를 해소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다가올 중요한 정치 일정을 앞두고, 각 대선 캠프에서는 이러한 고교 교육의 현실과 고교학점제의 위기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지원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단순히 제도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제도의 철학을 살리고 현장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적 의지와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나는 한때 고교학점제를 추진했던 사람으로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아쉬움과 책임감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고교학점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현재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고교학점제가 우리 교육의 긍정적인 미래를 이끄는 제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글이 현재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고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 정책을 현장에 안착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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