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전의 영수증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지독한 명제

by 이은

밀린 가계부를 정리하며 영수증 하나를 손에 들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2024년 1월 10일 03시 10분에 쌍화차와 유자차 그리고 생수가 결제된 편의점 영수증이다. 아버지 임종 2분 전이었다. 영수증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영상처럼 펼쳐졌다.


시속 150km로 달려간다 해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킬 수는 없었다. 앞으로 3일은 무조건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당장 곁에 있는 남편의 컨디션을 살펴야 했다. 감기 기운이 있어 자기 전 약을 먹었지만, 몇 시간 사이 컨디션은 더 나빠졌기 때문이다.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를 아파트 정문 바로 옆 편의점 앞에 세우고 쌍화차와 유자차, 생수를 샀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위에서도 나는 남편의 컨디션을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은 물론 상을 치르는 3일 동안 최악의 컨디션은 피해야 했기에. 어쩌면 비겁하고도 지독한 말일지 몰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 와중에도,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마저도.


병원으로 가는 동안 오빠와 통화를 하며 급하게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마냥 슬퍼만 하기에는 처리해야 하는 현실적인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계셨던 병원은 친정 동네의 대학병원이지만 장례식장이 매우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 조문객의 대부분이 오빠의 손님들일 것을 고려해 오빠와 내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빈소를 잡기로 했다. 죽음을 예약할 수는 없으니 장례식장을 미리 예약할 수는 없었다. 서너 군데 병원의 장례식장을 알아보며 5분 전에는 사용 가능하다던 빈소가 전화를 끊고 잠시 상의하는 사이 다른 유가족에게 예약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곳에서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뻥 뚫린 새벽 시간 내부순환로에서 바로 내 앞을 달리고 있는 오빠 차를 보았다. 내가 장례식장을 알아보는 동안 오빠는 내 앞에서 상조회사를 알아보고 있었다. 오빠의 회사는 외국계 기업이라 그런지 회사에서 지원되는 상조는 없었고, 남편의 회사는 국내 기업이지만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차에서 내리지 못했다. 한참 후에 내린 오빠의 눈은 벌게져 있었다. 우린 별다른 얘기 없이 중환자실로 올라갔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넋이 나간 듯해 보이던 엄마는 우리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난 그런 엄마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고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쪽.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엄마의 말대로 내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던 수액도, 그 어떤 기계 장치도 없었다. 모든 전원이 꺼져 어두워진 방처럼 아버지는 그저 고요히 누워있었다. 아버지는 왼쪽 눈을 살짝 뜨고 있었다. 잠이 들려는 건지, 잠에서 깨려는 건지 그 상태로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았다. 여러 번 아버지를 불러보았지만 아버지의 입에선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빠가 눈을 감겨 드리려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떼어지지 않는 입과는 달리 왼쪽 눈은 끝내 감기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뱉는 순간, 그 감기지 않는 눈으로 아버지는 무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환자실에서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장례식장은 다른 병원으로 가기로 했으니 아버지를 운구해 줄 상조회사의 차가 도착하기 전까지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그 사이 수납을 하고 사망 진단서를 받았다.


사망 진단서에 적혀있는 사망 원인의 직접 사인은 패혈증이었다. 패혈증. 낯설지 않은 단어였다. 오래전, 처음 유산을 했을 때 “자칫 잘못했다가는 패혈증까지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임신 중 오래 지속된 출혈로 융모막까지 감염되었다며 담당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다. 이후로 네 번째 유산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소파수술 후 골반염 때문이었지. 내게서 생명이 떠나갈 때 들었던 단어를, 이제는 내 생명의 근원이었던 아버지의 마침표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사망 진단서를 받아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구해 주실 분이 도착했다. 중환자실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아버지가 나왔다. 병원으로 오실 땐 이런 모습을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슬픔을 억누르고 아버지를 조심히 잘 모셔달라 부탁했다. 오빠는 바로 인천으로, 나와 남편은 엄마를 모시고 일단 엄마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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