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직한 애도
아버지는 따로 찍어둔 영정사진이 없었다. 쓸만한 증명사진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제대로 찍은 가족사진도 없었다. 가족이 모여 찍은 건 생신 때가 전부인데, 사진 속 아버지는 미소도 없이 귀찮아 죽겠는 얼굴로 그저 정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손주들이 있어 가능했던 거지, 오빠와 나만 있었을 땐 어림도 없던 일이다. 그런 분이니 최근의 아버지 모습을 담은, 영정사진으로 쓸 수 있는 마땅한 사진이 없었다.
아버지가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는 건 우리 가족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조금이나마 건강하실 때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엄마와 나눈 적이 있다. 물론 새롭게 찍는 건 쌀알만큼의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후 엄마는 언제 찍었는지 모를, 최소 15년 이상은 되었을 아버지의 증명사진 하나를 찾아 내게 주셨다. 당신은 잊어버릴 것 같으니 갖고 있으라고. 결국 그 사진이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되었다.
오전 11시경 장례식장에서 만들어 준 부고장을 받았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둔 지 10년이 넘었다. 나의 핸드폰 속 연락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여러 번의 정리 끝에 100명이 조금 넘었고, 경조사라는 턱이 세우고 나니 소수의 인원만이 남게 되었다. 그들에게 부고장을 돌렸다. 난생처음 발송하는 부고장의 낯섦이 사라지며 마음속엔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텅 빈 빈소에 앉아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사진 속 아버지는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가만 보니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의 얼굴을 말없이 보고 있자니 1년 반 전, 백내장 수술 때문에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병원에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우리는 다정한 부녀 사이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 모로 누워 자고 있는 아버지를 그린 적이 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다정했던 기억은 그게 전부다. 그것도 다정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내 첫 기억 속에서부터 아버지는 늘 술 냄새를 풍겼다. 이제 막 마신 술이 몸속에 퍼져나갈 때거나, 이미 온몸에 알코올이 퍼져있을 때거나, 전날의 숙취가 아직 몸에 남아있을 때의 지독한 술 냄새.
언젠가 엄마가 내게 나의 일기장에서 '아버지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었으나, 내 유년 시절의 진심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드라마 속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말 그대로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적어도 그때의 내게 아버지는 멀리하고 싶은, 그저 싫은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부터였을까. 아버지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보게 된 게. 결혼 후 만나게 된 또 다른 아버지, 시아버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정한 시아버지가 좋았다. 친정아버지와 평생 나눈 대화보다 시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더 많았다. 둘이서 있을 때면 당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며 비슷한 연배인 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똑같이 고단한 시절을 통과해 왔건만, 아픈 몸으로도 당신의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꿈꾸던 시아버지와는 달리 내 아버지는 그 어느 것에도 흥미를 갖지 못했다.
취미라는 게 있었을까. 여행이라는 걸 가보기는 했을까. 머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어려서 공부를 좋아하고 잘하기도 했지만, 돈이 없어 중학생이 되지 못했다. 평생 학력 콤플렉스를 갖고 살았다. 내몰리듯 군대를 가고, 다시 돈을 찾아 군을 나와 운전대를 잡았다. 노쇠한 부모를 돌봐야 했고, 아내와 자식을 건사해야 했다. 그저 일만 하고 피곤한 몸은 술로 달랬다. 자신을 돌보는 것에는 소홀한 채. 어쩌면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던 큰고모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한쪽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다. 스트레스라고 했다. 병원을 다니거나 시력에 맞는 안경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그때부터 자신을 놓아버렸다. 귀찮다는 말로 가족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렇게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고 아버지 병원에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백내장 수술을 받고 이후 진료까지 약 두 달. 인천에서 서울 노원까지 다니는 길이 사실 조금 버겁기도 했다. 운전대를 잡고 무거운 눈꺼풀과 싸워야 하는 시 간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포기하지 못했던 건, 병원에서 진료나 검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이따금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때문이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시간에 우리는 누구보다 다정한 부녀 사이가 되었으니까. 비록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다시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 버릴지라도.
속내를 말할 줄 모르는 사람.
인생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
자신을 위해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사람.
외로운 사람.
가여운 사람.
미안한 사람.
고마운 사람.
나의 아버지.
웃는 것 같던 사진 속 표정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의 죽음 그 자체보다, '아버지'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가여워서. 차오르는 눈물은 애써 참지 않았다. 그 순간 그곳에 앉아 흘리는 눈물이야말로 내가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애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흘렸던 눈물을 한 자 한 자 글로 옮겨 적으며 다시 한번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