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당신이 서둘러 떠난 이유
보통 장례 첫날엔 조문객이 많지 않다지만, 오히려 첫날부터 밀려드는 조문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새벽에 돌아가셔서 비교적 이른 시간에 부고를 돌려서이기도 하겠고, 조문객의 7할 이상을 차지한 오빠의 손님들 중 평일 낮시간의 시간 제약이 유독 적은 이들이 많아서이기도 했다.
절이나 목례, 기도 등 각자의 종교와 신념에 맞게 조문을 마친 이들 중 상당수가 같은 말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또는 "병원에 언제 가신 거야?" 아니면 "병원에 안 가신다고 했잖아." 등으로.
아버지는 병원을 정말 가지 않는 분이었다. 한 번은, 엄마가 코로나에 확진되었을 때였다. 나와 오빠의 걱정은 아픈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했다. 백신도 맞지 않으셨고 미루어 짐작하건대 면역력도 많이 떨어져 있을 게 뻔한 아버지. 그러나 우리의 걱정에 돌아오는 대답은 "제발 신경 쓰지 마라. 자식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 (엄마의 의견은 무시한 채) 우리가 알아서 한다. 귀찮으니 그만 얘기해라."였다. 당신의 그런 고집이 오히려 자식들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덕분에 격리 중인 엄마는 당신의 아픈 몸을 돌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고, 수시로 집안 환기와 소독을 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나와 방까지 가지 못한 채 방문 앞에 힘없이 누워버렸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위생장갑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너무 뜨겁고, 엄마 혼자서는 축 처져 무거워진 아버지를 도저히 방까지 옮길 수가 없다고. 급한 마음에 119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출동한 구급 대원들의 손길마저 거부했다. 그들의 의견은 이러했다. 확진자와 동거 중 발생한 고열이니 1. 확진일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본인들(구급 대원)은 확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검사가 불가하다). 2. 일반 응급실에선 받아주지 않을 거고, 확인해 보니 들어갈 수 있는 자리도 없다. 3. 무엇보다 환자 본인이 거부하고 있어 설사 자리가 있다고 해도 임의로 모시고 갈 수는 없다.
아버지는 병원에 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렇게 고열에 몸을 가누기 힘든 와중에도 말이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는 건 바로 그걸 지켜보는 엄마와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핸드폰 너머로 듣고 있는 나의 마음이었다. 출동한 구급 대원들은 아버지를 방으로 옮겨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다행히도 해열제를 복용한 아버지의 열은 서서히 떨어졌다.
어느덧 노인이 된 아버지는 볼 때마다 조금씩 쇠약해지고 있었다. 어린아이라면 들쳐 업고라도 병원에 가 검진이라도 받아보겠지만, 성인인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었다. 평생 효자로 산 당신이라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있겠냐고 사정을 했다. 또 어느 날은 나중에 속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식들 욕 먹이고 싶냐고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니 제발 병원 좀 가보자고, 가볍게 건강검진이라도 받아보자고, 그러면 더 이상 병원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얼굴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탁을 하고, 사정을 하고, 화를 내고, 무게를 덜고 말해보기도 했지만 그 모든 순간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됐어. 저리 가. 귀찮아. 나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당신 스스로 하셨을 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드디어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고 기뻤다. 큰 병원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마음을 바꿔 안 가겠다고 하실 것 같아 집 근처 대학병원으로 갔다. 수술 전 검사에서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채혈로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았다. 덕분에 안과는 물론 비뇨기과와 혈액종양내과의 진료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호자들은 대체 뭐 하고 있었냐는 담당 교수의 질타가 있었지만, 예상했던 반응이라 쓰리기는 했어도 아프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술이 가능한 백내장이라니 그런 질타마저도 감사했다.
백내장 수술 후 아버지의 시력은 안경을 쓴 나의 교정시력보다 좋아졌다. 비뇨기과와 혈액종양내과 진료도 몇 차례 더 이어졌다. 그러나 당신이 느끼기에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걸까. 처방받은 약을 조금씩 미루기 시작했다. 한 달간 복용하라는 약은 한 달이 지나도 반 이상 남아있었다. 이후 진료가 예약된 날짜에 아버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밝아진 눈으로 좋은 것도 보고 좋은 데도 가기를 바라는 건 가족들의 욕심이었다. 아버지는 동굴 같은 방에서 그저 TV만 보고 이따금 찾아가는 가족들 얼굴만 볼 뿐이었다. 다시 시작이었다.
한두 달 전쯤, 아버지는 엄마에게 당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단다. 그래도 병원은 가지 않을 거고, 죽게 된다면 집에서 죽을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친정 근처 주민센터를 통해 해당 지역 복지관의 상주 간호사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병원에 가려 하지 않는 분께 방문해서 해드릴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러나 언젠가 들었던 구급 대원의 말과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본인이 거부하면 혈압도 잴 수가 없다고. 이미 알고 있는 답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그분은 나를 위로했다.
1월 첫째 주말에 엄마는 내게 아버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바람 소리인지 쇳소리만 난다고 했다. 그렇게 월요일 집으로 가서 마주한 아버지는 한 달 전 생신 때보다 더 쇠약해져 있었다. 엄마의 말처럼 말소리는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날 오후, 더는 안 되겠다 싶었던 엄마는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119를 불렀다. 아버지는 예전처럼 완강하지 못했다. 그만큼 기력도 없었다.
이불 채로 들린 채 응급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열 시간이 넘는 검사 끝에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신의 마지막은 집에서 맞겠다는 당신의 고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월요일 오후 응급실에 들어가 수요일 새벽에 마지막 숨을 뱉은 아버지.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 자식들에게 부담될까 서두르신 걸까. 이른 시간에 부고를 돌리게 하고, 삼일장을 치른 뒤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 주말 동안은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려고 그토록 서두르신 걸까. 평생 자식들에게 짐 되기 싫다던 그 고집불통 아버지답다. 어쩌면 그건 고집이 아니라,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