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챕터를 지나가는 중

두고 온 우산 하나

by 이은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린 날이었다. 새벽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은 떠졌지만, 몸은 쉽사리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조금 더 자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눈을 감아 보아도 끝도 없이 무겁게만 느껴지는 몸과는 달리 눈꺼풀은 속도 모르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었다.


작은 외삼촌을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다. 계속해서 회의가 잡혀있는 오빠는 오전에 급하게 업무를 마치고 따로 출발하기로 하고, 나는 친정으로 가 엄마를 모셔가기로 했다. 서로의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삼촌이 계신 곳에 가까워질수록 눈은 점점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르게 쏟아졌다. 그래,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다. 언젠가 강릉에 갔을 때 트랙터로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을 보았는데, 이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때의 강릉처럼 트랙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부터 작은 외삼촌과 큰어머니, 그러니까 당신의 작은 처남과 형수가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자식들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차를 정리하고 더는 운전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 다시 차를 사라고 하셨을 정도로.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모시고 가기에도 그분들이 오시기에도 여의치가 않았다.


내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저녁밥을 차려 달라고 말씀하시고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아침에 일어나 생생하게 기억나는 꿈을 핸드폰에 메모했고,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꿈 얘기를 했었다. 나의 꿈 얘기를 들은 엄마는 아버지가 꾸었다는 꿈을 내게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그 무렵 아버지의 꿈에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나왔다고 했다. 꿈에 나타난 큰아버지는 '우리 형제들 나랑 같이 가자'라고 하셨단다. 그 소리에 놀란 엄마는 아버지에게 절대 큰아버지 손을 잡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던데, 우리 아버지, 결국 그 손을 잡으신 건가. 큰아버지는 기어이 동생을 데려가신 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큰아버지의 첫 번째 기일이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던 작은 외삼촌은 길어진 감기에 컨디션이 나빠져 병원에 가셨다. 처음엔 응급실로 가셨으나 다행히 일반 병실 입원도 가능하다 하여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급격히 상태가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식 없이 호흡기에 의존하던 삼촌은 결국 다음 날 오후 숨을 거두셨다. 운명은 잔인했다. 응급실에 가신 날도, 중환자실로 들어가신 날도, 끝내 돌아가신 날까지도 모두 아버지와 같은 날이었다.


아버지의 응급실에서 엄마는 당신 오빠의 입원 소식을, 이어 남편의 빈소에서 오빠의 사망 소식까지 들어야 했다. 엄마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대신, 작은 외삼촌은 오빠이자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빈소에 마련된 방에서 엉엉 울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토록 가혹할 수 있을까. 새벽에 남편을 잃고, 오후엔 오빠를 잃은 엄마의 세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드라마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 영화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SF 장르가 아니라면 그 이야기들 또한 우리가 사는 모습이 아닌가. 결국엔 우리가 사는 게 그렇더라. 매일이 유쾌하고 명랑하고 로맨틱하기를 바라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잠시 빛나는 순간들을 동력 삼아 굴곡진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발견하고, 흙먼지 속에서도 꽃을 찾으면서. 나는, 우리는, 그런 드라마 같은 현실을 살아내는 중이다. 비록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 뜬금없이 눈물 콧물 쏟아가며 엉엉 울 정도로 슬픈 챕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해피 엔딩이기를 바라며. 그렇게 지금의 이 슬픈 페이지를 묵묵히 걸어가는 중이다.


기어코 삼촌을 마주한 엄마는 삼촌이 잠들어 있는 자리 위로 눈이 쌓일 틈도 없이, 눈물을 닦던 손으로 연신 눈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오빠 눈 맞지 말라"며 쓰고 간 우산을 그 자리에 가만히 씌워두었다. 하얀 눈밭 위로 들고 간 꽃과 덩그러니 남겨진 우산을 뒤로하고, 엄마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 그곳을 떠나왔다.


아버지는, 아빠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작은 외삼촌을 만났을까. 그렇다면 두 분은 갑자기 떠나버린 그곳에서 좀 덜 외로우시려나. 삼촌, 우리 아빠를 만나거든 언제나 나를 두 팔 벌려 안아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좀 꽉 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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