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
길을 걷다 주저앉았다. 하늘이 핑 도는 기분. 주저앉을 정도는 아니어도 어지러운 건 빈번히 일어났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근래 가장 자주 만나는 P가 조심스레 검사를 권유했다. 내 기억 속 마지막 빈혈 수치는 8 언저리다. 약 2년 반 전 선근증 수술을 했을 때 퇴원 전의 수치였고 그로부터 보름 후면 정상수치가 될 거라는 얘기를 들었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어쩐지 더 미루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움직였다. 어디 큰 병원으로 가지는 않고 다니던 동네 내과를 찾았다. 워낙 환자가 많은 병원. 따로 예약은 받지 않아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진료가 시작되면 좀 한산해질까 싶어 나름 시간을 맞춰 왔는데도 대기가 길다.
이곳에 매일 아침마다 오던 적이 있었다. 내 인생의 목표가 임신과 출산이던 시절. 배아 이식을 하고 출혈 때문에 질정을 쓰지 못해 프로게스테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그 주사는 배가 아닌 엉덩이에 맞아야 하는 근육주사라 내가 직접 주사를 놓기가 어려웠다. 시술받은 병원에서 의뢰서를 받고 집과 가까운 이 병원에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엉덩이에 주사를 맞았더랬지. 이식 후 결과를 기다리던 시기도 있었고, 임신 후 살얼음판을 걷는 시기도 있었다. 그때 이후 처음 온 것도 아닌데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다 보니 잊고 있던 그 시절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대기실 옆 주사실 안에 엉덩이를 까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를 보니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그런 내게 '너 참 애썼고 수고 많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드디어 대기 전광판 첫 번째 페이지에 내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루한 대기가 끝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