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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Nov 02. 2022

구름을 뚫고 나온 빛

45년생 운광 이야기

45년생 운광은 3남 2녀 중 넷 째고 11살 차이 나는 어린 아내의 남편이며 아들 딸 남매의 아버지이다.


어린 운광은 공부를 잘하는 아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 1등은 도지사상, 2등은 국회의원상을 받는데 운광은 1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상을 받게 되었다. 도지사상은 성적이 좋지는 못했지만 부잣집 아들이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자존심이 상했다. 너무 화가 나 생에 마지막이 될 졸업식에는 가지도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엔 진학할 수 없었지만 공부는 계속하고 싶었다. 다행히 한문을 가르쳐 준다는 곳이 있어 한문을 배우며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집에서 거리가 좀 멀었지만 그건 전혀 문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한문을 배우러 갈 때 중학교를 지나가야 하는 일, 혹시라도 그 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을 마주치는 일이었다. 때문에 안 그래도 먼 거리가 배로 늘어나더라도 삥 돌아 최대한 학교를 피해 다녔다. 먼 길을 걸어 다니느라 힘들었지만 그렇게라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집에 돈은 없었어도 땅은 있었다. 농촌진흥청에서 뽕나무를 재배할 수 있게 교육과 지원을 해준 덕에 그 땅에 뽕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자라면 누에도 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조금씩 희망이 차오를 때 입대 영장이 나왔다. 지금처럼 입대를 연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징집'. 아쉽기는 했어도 걱정은 없었다. 몇 년의 공백이 있겠지만 제대하고 나오면 심어놓은 뽕나무로 뭐라도 할 수 있을 테니 충분히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군에 입대하고 제대를 할 무렵, 운광의 희망이 가득 심어진 그 땅은 아버지의 노름빚으로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 돈만 생기면 노름을 하는 운광의 아버지. 식구들은 굶거나 말거나 아버지의 안중에는 없었다. 한 번은 보다 못한 외삼촌이 쌀이라도 사라고 돈을 주었는데 그것마저 들고나가 노름을 했던 분이 운광의 아버지다. 그런 양반이 운광의 미래를 노름과 맞바꾼 것이다. 허무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원망스러웠지만 열두 살에 시집와 내내 고생만 하시는 불쌍한 어머니를 생각하니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서운한 마음은 도저히 밖으로 내색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속으로 삭이는 것 밖에. 그 시절 담배를 배웠다. 제대가 코 앞이었지만 다시 집으로 간다 해도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일단 장기 복무를 하기로 했다.

 

군대는 힘들긴 해도 운광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동향의 군대 동기를 통해 아내 영란을 만났고, 운전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 운수회사에서 근무하는 형님의 월급이 군대에서 받는 월급의 몇 배가 되는 걸 보고는 제대를 결심했다. 그때 나이가 스물아홉. 중사였다. 가정을 꾸렸지만 내 가정만 돌볼 수는 없었다. 집안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와 형님의 빈자리를 채울 수밖에 없었고 고생하는 어머니를 돌보느라 제대 축하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린 아내에게 부모님을 맡기고 본격적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운광의 차에는 늘 가족의 생계가 함께 탑승해 있었다.


운광에게 가장이란 돈을 벌어오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저버렸던 그 가장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운광이 해야 할 일이었다. 매달 꼬박꼬박 집에 월급을 가져다주는 것 이외 다른 욕심은 없었다. 딱 월급만큼의 욕심. 그거면 충분했다. 일을 하고, 지친 몸은 술과 담배로 달래주면 그만. 다른 건 재미있는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비록 가족이 다 함께 여행 한 번 가지 못하고, 가족사진 한 번 제대로 찍은 적이 없지만 괜찮았다. 월급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느덧 아들 딸은 각자 가정을 꾸려 나갔고 없는 살림에 악착같이 살아가던 아내와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두껍게 자리해 있었다.


퇴직 후엔 그냥 쉬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즐겨본 적이 없으니 즐기는 방법을 몰랐고, 어려서부터 다정함을 받은 적이 없으니 다정함을 나누는 방법도 몰랐다. 아내와 자식들이 건네 오는 마음은 온전히 받지 못하고 본인도 모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실은 화가  것이 아니라 조금은 어색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었는데. 돈을 버는 일이야 스스로 살아가는 목적이지 그것으로 가족을 돌보았다고  수는 없을  같다. 정서적으로 돌보지 않았던 대가로 마찬가지로 돌봄을 받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운광은 늙었고, 거동이 불편해졌다. 종일 틀어박혀있는 방안이 가장 편한 공간이 되었다. 방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지난 인생이 구름 투성이었던 것처럼 앞이 흐릿하다. 흐릿함에 익숙해져 흐릿한 줄 모르고 지냈으나 점점 더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 같다. 제발 귀찮게 하지 말라고 늘 벽을 세워왔지만 용기를 내 가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번에 걸쳐 수술을 하고 딸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그동안 흐릿하게만 보이던 근처의 공원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적당했으며 노랗고 붉은 단풍이 가득했다. 계절의 변화를 피부가 아닌 눈으로도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흐릿한 채 익숙했던 시야가 맑아지니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기도 한다.


雲光. 지금껏 구름 속에 갇혀 빛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구름이 걷히고 있는 것 같다. 비록 노년의 삶이지만 어쩌면 조금씩 빛이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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