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에 1천 원
겨울 간식의 대표 메뉴 붕어빵을 요즘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지. 그래서 붕어빵 가게를 찾을 수 있는 앱도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붕세권이라는 말이 있을까. 비슷한 예로 호세권(호떡)도 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작은 동네엔 붕어빵 파는 곳이 무려 네 군데가 있고 그중 세 곳이 호떡을 함께 판매하고 있다. 붕세권과 호세권, 다시 말해 겨울 간식 천국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쉬운 건 대부분 붕어빵이 3개에 2천 원이라는 착하지 못한 가격. 심지어 서울 송파 어디에 살고 있는 지인의 동네엔 무려 1개에 1천 원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작년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붕어빵에서 물가 상승을 새삼 실감한다.
가볍게 커피를 마시고 일어날 때 들어가는 길에 붕어빵을 사자고 얘기를 꺼낸 건 P였다. 아직 올해 첫 붕어빵을 개시하지 못한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비록 공기는 썩 좋진 않았으나 비교적 따스한 햇살 아래 운동 겸 산책 겸 걸어 D 마트 앞 할머니가 하신다는 곳으로 붕어빵을 사러 갔다. 팥 붕어빵과 슈크림 붕어빵이 있었고 2개에 1천 원이라는 얘기에 P와 나 각각 4개씩 포장을 했지. P가 5천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고 나머지 1천 원을 채우려 어묵을 하나씩 먹었다. 포장마차 앞에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무심한 듯 놓여있었고 우리는 종이컵에 따끈한 어묵 국물을 담아 별생각 없이 그 의자에 앉았다.
이미 아주머니 한 분이 할머니를 마주 보고 앉아 호떡을 드시고 계셨다. 나와 P, 호떡 드시던 아주머니 그리고 호스트 할머니까지 네 명의 자연스러운 스몰토크가 이어졌다.
이야기의 시작은 김장을 앞두고 할머니의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매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그 마지막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자식 셋 김장을 해주고, 조카의 몫도 챙겨 둘 예정이라고. 그 조카는 어릴 적 동생 부부가 이혼을 하는 바람에 4살 때부터 자식처럼 데려다 키웠는데 사춘기 시절 싸움을 해 학교에 불려 가 교무실 앞에서 같이 무릎 꿇고 손들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고모가 함께 벌을 받는 모습을 본 조카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속 썩이는 일이 없었다고. 조카의 아버지인 동생을 앞세워 보내고 너무나 괴로웠던 시간으로 이야기는 흘러갔다. 어느덧 호떡을 드시던 아주머니도 붕어빵 봉지를 들고 있던 우리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물입 해 있었고, 어느 이야기에선 나도 모르게 주책맞게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동생 둘을 앞세우고 너무 괴로운 나머지 집 앞에 아무도 없는 논이고 밭이고 나가서 목놓아 소리쳐 동생들 이름을 부르고 한참을 앉아 있다가 들어왔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은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고 어느새 배가 고파 밥을 먹고 있더란다. 그런데 마음은 찢어져도 배는 고프고 밥은 들어간다는 사실에 또 괴로웠다는 이야기.
17주 품었던 쌍둥이를 낳아서 보낸 후였다.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남겨진 집에서 참 많이도 울었다. 괴로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목놓아 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배가 고프면 한 솥 가득 끓여진 미역국을 데워 먹다가 그 와중에 밥을 먹는 내가, 국까지 데워서 먹는 내가 징그러웠다.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눈물도 미역국도 밥 먹는 내게 느끼는 환멸도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는데, 어느샌가 희미해진 그때의 그 감정이 할머니의 얘기에 툭 튀어나와 버린 거다. 할머니의 상황이 그려졌고 내 모습이 겹쳐졌다. 붕어빵 봉지를 들고 터진 눈물은 그래서였다.
집으로 돌아와 붕어빵을 꺼냈다. 차갑게 식었지만 그대로 한 입 베어 물었다. 빵은 얇고 팥은 꽉 차있다. 주책맞게 눈물을 보였던 생각에 다시 목이 메었지만 분명 맛은 있었다. 체하지 않게 천천히 씹어 목으로 넘기며 붕어빵 할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우리의 내일은 그날과 조금 멀어지기를 바랐다. 어쩌면 다시 봄이 오기 전까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아니 붕어빵을 사러 종종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때는 울지 말고 웃고 올 수 있기를. 눈물 젖은 붕어빵은 이번 한 번으로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