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 마음의 문제
오랜만에 김포 L 여사님과 약속이 있는 날이다. 루피와 보아, 똥강아지 둘을 모두 대동하고 말이지. 만나지 못하고 여름과 가을을 보낸 만큼 여사님도 나도 쌓인 얘기가 많다. 이야기를 풀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금방 헤어질 시간이 될 것이다.
요 며칠 계속 피곤하다던 남편은 어제 아침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윗입술이 터져있었다. 피로가 눈으로 오는 나와는 달리 그는 입술로 온다. 입술이 이렇게 터졌다는 건 쉬고 싶다고 몸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얘기다. 연말이 다가오며 벌써부터 술자리도 꽤 생기고 있고, 회사에서 연차 소진을 독려하고 있다 하여 11월부터 금요일마다 반차를 사용해 거의 매주 캠크닉을 다녔으며, 쉬어야 하는 주말엔 종종 라운딩을 다녀왔으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늘어지게 자는 것으로 피로를 푸는 사람인데 그러질 못하고 야금야금 적립하듯 피로를 쌓아왔으니 입술이 터질 만도 하다. 결국 그는 예정에 없던 휴가를 쓰기로 했다. 하필 내가 약속이 있는 날에.
하필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이다. 더구나 루피와 보아도 함께 움직이는 날이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겠다. 물론 휴가지만 처리해야 하는 업무는 있겠지. 그래도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누구의(루피와 보아)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의(... 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자고 싶은 만큼 잘 수 있을 테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게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오히려 내 마음이 문제다. 그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가는 내 마음.
남편의 식사를 챙기는 것.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아내의 모습. 무의식 중에 엄마가 규정해 놓은 아내의 역할은 그것이 기본이었다. 자식의 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남편의 밥이 늘 우선이었다. '차려 놓은 거 먹어', '냉장고에 있는 거 꺼내 먹어'라는 말을 들은 적은 종종 있지만 그 얘기를 남편인 아버지에게 하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유년 시절 보았던 부모님의 모습이 내게 투영되어 있었나 보다.
반면 남편은 나와는 굉장히 다른 시간을 보냈다. 시어머니는 교회 일로 늘 바쁘셨기 때문에 특히 주말이면 그런 엄마의 빈자리를 아버지와 함께 채워나갔다고 했다. 밥은 라면이나 짜장면이나 집에 있는 아무거나 꺼내 먹으면 그뿐. 식사 시간에 엄마가 없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는 엄마 없이 아버지가 차려준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지금도 엄마는 밖에 있다가 아버지의 밥을 챙겨야 한다며 집으로 돌아가곤 하신다. 그놈의 밥이 뭔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종일 집을 비우는 날 남편이 집에 있다면, 혹은 외출한 사이 남편이 이른 퇴근을 한다면 밥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정작 그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하는데도 말이지. 아, 정말, 그놈의 밥이 뭐니.
결국 내 마음이 문제였구나. 종일 집에 혼자 있는 그를 두고 외출하는 오늘은 일부러 더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물론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맞지만 스스로 조금 느슨해질 필요는 있다는 걸 이렇게 깨달았으니 일종의 연습이라고 해두자. 그의 말처럼 애도 아니고 집에 먹을 게 없는 것도 아니니 먹고 싶은 걸 찾아 먹겠지. 그런 삶을 살아온 친정 엄마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데 내가 괜히 거기에 얽매어 있었구나.
알아서 먹고 있어.
나 나갔다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