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기
똥강아지들 산책을 하고 들어와 발을 닦다가 시커먼 구정물이 가득 나오는 걸 보며 '아이고 드러버라' 소리가 절로 나와버렸다. 사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불과 2주 전에 나는 눈길을 걸으며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었는데 그 기억은 까맣게 잊고서 싫은 소리를 숨 쉬듯 뱉고 있다니 말이다.
뭐 했다고 몸이 이리 피곤한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한 시간만 더 자겠다고 누워서 두 시간을 푹 자버렸다. 설마 어제 눈밭을 산책하느라 몸이 힘들었던 걸까.
얼마 전 참 이쁜 눈이 내리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또 큰 눈이 예보되어 있었다. 내 똥강아지들 원피스 남매와 아침 산책을 하며 혼자만의 다짐을 했다. '눈이 내리면, 눈이 이쁘게 내리면, 똥강아지들은 두고 혼자 나가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와야지. 카페 같은 실내가 아니라 공원에 가서 눈을 맞으며 걸어야지' 하고.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 똥강아지들 뒤처리를 하고 남편이 부탁하고 간 일을 몇 가지 마친 후 주방에 섰는데, 어, 눈이 내린다.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 눈송이는 크지 않다.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행주를 삶고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데워 라테를 만들어 텀블러에 담았다. 지금이야.
언젠가 시어머니 댁에서 가져온 털모자를 쓰고 얼마 전 다이소에서 구입한 천 원짜리 장갑을 꼈다. 이왕이면 조금 더 기억에 남을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에 내 방 모니터 앞에 놓아둔 작은 미니어처 나무를 챙겼다. "나갔다 올게!" 똥강아지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1층 현관 밖으로 나왔는데, 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 눈이 내리는 날 공원에 갔을 때 거대한 스노우볼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그날의 나는 기분에 취해 감정이 극대화되어 과장을 했던가 보다. 지금이 바로 그거구나 싶었으니까. 정말 너무나도 예쁜 눈이 조용히, 그러나 굉장히 요란하게 내리고 있었다.
지난여름 비가 오는 날 우산을 들고 연꽃 사이로 우중산책을 즐긴 적이 있었다. 그날과 같은 공원 길을 걷다 보니 여름날의 산책이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내 마음은 아까부터 두근거리고 있었는데 눈길을 걸으며 빗길을 거닐던 그 기분이 생생하게 느껴지니 마치 두 계절을 함께 느끼는 것 같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왔고 말 그대로 행복했다.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들고 있는 우산 위로 사라락사라락 눈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멈춰 서서 귀를 잔뜩 열고 소리를 듣다가 접힌 팔을 펴고는 우산을 접고 눈을 맞았다. 커다란 눈송이가 얼굴을 간지럽히고, 안경을 툭툭 건드려도 그대로 두었다. 장갑 낀 손을 뻗어 그 위로 살포시 앉는 눈을 바라보았다. 내리는 눈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다.
공원 안 작은 정자에 앉아 준비해 간 미니어처 나무를 꺼내고, 아직 뜨거운 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앉아 내리는 눈을 보고 있을 때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눈이 와!'
'응. 이미 나와 있어. 혼자 즐겨서 미안.'
'이 시간엔 어쩔 수 없어. 누구라도 즐겨야지. 감기 걸리니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감성 충만하고 들어가!'
함께 하지 못하지만 함께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제는 종일 땅에서 발을 뗀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 덕인지 오늘 아침 컨디션은 삐끗했을지라도 언젠가 웃으며 꺼내 볼 좋은 추억 하나 진하게 가졌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간사한 마음을 반성하며 그날의 기록을 꺼내 보았다.
그렇게 쌓인 눈이 아직 동네에 가득인데 밤사이 또 눈이 내렸다.
확진으로 격리 중일 때 창을 통해 길 건너 공원에 쌓인 눈을 보면서 그 꿈같던 시간을 떠올리며 답답했던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잖아. 그러니 산책 후 더러워진 똥강아지들의 발 정도는 기꺼이 웃으며 닦아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을 쌓은 대가로 얼마든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