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 Mar 03. 2023

덕질의 순기능

그대처럼

요즘 김포 L여사님은 포레스텔라에 열광한다. 스누피를 좋아하던 시누이는 최근엔 펭수를 좋아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 사촌 시누이는 멤버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잔나비의 모든 공연을 함께 하고 있다. 스물두 살의 조카는 자우림에, 짧은 소설을 쓰는 P언니는 BTS를 사랑하는 아미다.


카카오 프렌즈의 캐릭터 중 라이언을 너무나 아끼는, 한참 잠수 중인 C여사님이 튀김 족발이 유명한 집을 향해 걷던 어느 날의 문래동 길가에서 "이여사, 넌 요즘 어떤 것에 빠져있어?"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난 대답하지 못했다. 걸음을 늦추고 생각을 해봤으나 역시 떠오르는 대상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하루하루 살아내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을 때였다. 엄마가 되는 일에 몰두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내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였다. 웃고는 있었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목표를 잃었으니 내 삶은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루하루, 매 순간 정신 붙들어 매고 살아가기도 버거웠기 때문에 무언가에 몰입할 여분의 에너지가 없었다.


며칠 전, 밤산책을 하다 상가를 지나던 길에 건물 3층 노래방의 불빛이 알록달록 바뀌는 걸 보았다. 누군가 열창을 하고 있는가 보다. 저 방에선 지금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노래방에 갔던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문득 노래방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에 링크라도 달린 듯 떠오른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와일드 로즈의 <그대처럼> 이다. 그 노래엔 꼬리가 달렸는지 수만 가지 생각을 달고 나와 이내 물감이 번지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부산 출신의 여성 락 밴드 와일드 로즈를 아는지.

락 밴드에 여성이라면, 보통 멤버 중 한 명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대부분 보컬이라거나 아님 어쩌다 악기 중 한 파트를 구성하는 정도로 말이지. 그러나 와일드 로즈는 당시에는 정말 흔하지 않던 오직 여성으로만 구성된 밴드였다. 부산여자대학교(당시 부산여전) 출신의 여성 락 밴드인데 실력은 너무 좋았지만 시대를 잘못 탄 건지, 회사를 잘못 만난 건지 어느샌가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노래는 물론 연주도 정말 좋았다. 대부분의 밴드가 그렇듯이 라이브가 몇 배는 더 좋았고, 프런트맨인 보컬뿐 아니라 무대 양쪽 베이스와 기타의 움직임은 비상하는 날개처럼 화려했다. 지금보다도 더 쌩긋쌩긋 웃는 여자 연예인을 원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기회가 줄었겠지. 오히려 지금 나왔더라면 더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유튜브에 남아있는 당시의 영상은 지금 봐도 여전히 멋있다.


그래. 나 이 밴드.  이 언니들 진짜 좋아했었지. 특히 베이스 치던 이인희 언니를 아주 좋아했더랬다.


생각해 보면 20대 초반의 청춘들이었지만 당시 고등학생의 눈으로 봤을 때도 무대 뒤의 이들을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지만 생각만큼 성과가 따르지 않아서인지 힘들어 보였고, 함께 지내고 있지만 모두 외로워 보였다.


당시 나는 문제아는 아니었으나 공부에 흥미는 없었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갓 대학생이 된 오빠와 고등학생 여동생이 다정할리 만무하다. 조금은 외로웠던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바로 이들이었다. 나의 외로움이 이들에게 투영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그 덕에 내가 견뎠던 것처럼 나의 팬심도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기를.


다시 돌아와, 덕질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게 들인 에너지가 결국은 내게 그대로 돌아와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지게 된다. 다시 말해 덕질의 순기능이라고나 할까.


문래동 길가에서 C여사님으로부터 그 질문을 받고 무려 4년의 시간이 지났다. 요즘의 나는 무엇에 빠져있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글쎄'라는 말이 먼저 나오지만 그 끝엔 희미하게 '나'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 5시에 기상을 하고, 108배를 하고, 명상을 하고, 새벽 글쓰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은 아니지만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운동을 하고, 나와 남편의 작은 성인 집과 사랑하는 똥강아지들을 돌본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하는 것들이다.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한 것들. 사소한 이 모든 것에도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그렇게 쏟은 에너지는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와 새롭게 충전 시켜준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모두 50대가 되었을 와일드 로즈.

두 손을 입으로 가져가 모으고 외치고 싶다.


'오겡끼데스까'


저는 잘 지내고 있으니 어디에서 무얼 하시건 부디 행복하시기를 바라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