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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Mar 21. 2023

밖으로 나와 발 끝에 힘을 주고 뚜벅뚜벅

기나긴 겨울밤의 끝

남편의 길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위해 예약을 하고 미용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언제나 바쁜 원장님이 씽긋 눈인사를 건넨다.


유목민처럼 떠돌던 미용실을 정착하고 원장님과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나와 같은 무자녀 부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남편과의 통화를 듣고 내가 아이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사실은 본인도 그렇다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더랬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부부인데 아이가 없다고 하면 그냥 '그렇구나'가 아닌 '왜?'부터 시작해 이후 파생되는 질문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다 커서 외국에 나가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던 차에 나의 무자녀 사실이 내심 반가웠던가 보다.


이후 그이는 병원에 다니게 되었고 몇 번의 시도와 몇 번의 실패를 겪었다. 나의 시험관 경험을 알고 있어서인지 나를 만날 때마다 그간의 시술, 진행상황, 컨디션 등을 봇물 터지듯 풀어놓곤 하는데 듣기 싫지가 않다. 이런 얘기는 경험해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듣거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다짐과 함께 다음 달 새로운 차수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이번에 추가된 영양제 얘기를 하는데, 정작 지금 시술 중인 사람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영양제 이름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이렇게 단번에 떠오른다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람의 기억이란 이런 거구나. 마치 오래전 즐겨 듣던 노래를 우연히 멜로디만 듣고도 자연스레 따라 부르게 되는 것처럼, 지긋지긋한 약의 이름도 그렇게 술술 나오게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잊고 지내던 노래 가사가 입 밖으로 술술 나올 때야 입술 끝이 달지만, 날카로운 뚜껑을 열 때마다 손을 다치지 않을까 조심하던 작은 갈색병의 그 비싼 영양제 이름이 이렇게 술술 나오는 건 생각보다 쓰다.


짧은 대기 끝에 차례가 되어 남편은 거울 앞 의자로 사라졌다. 사각사각 가위질이 시작된 것을 확인 후 핸드폰을 들어 지난 기록을 찾아봤다.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0여 개가 넘는 기록이 있었지만 결코 웃지 못할 시간이었기에 난임 전(戰)에서 백기를 들고는 더 이상 그 기록을 들춰보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의 내가 박제되어 그곳에 있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지내왔다.


용기를 내 그 가운데 하나를 열었다.




이번 차수엔 모든 게 완벽했다.


정말 기분 좋게 여행을 다녀온 후 생리가 시작되었고,

그 기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과배란을 시작했다.

고용량을 맞으면서도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고,

개수는 적었지만 모두 성숙난자로 채취되었으며,

채취와 이식 모두 내가 원하는 날에 진행되었다.

지금껏 채취하면서 입원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채취 후 컨디션도 꽤 좋았다.

만손초는 이식 후 클론을 주렁주렁 달기 시작했고,

심지어 이번 시술 소식을 전혀 모르는 친정 엄마는 태몽을 꾸어주셨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정말 너무나 완벽해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인지 슬프고 속상한 마음보다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이 크다.

그 모든 시그널로부터의 배신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수치로 맘 졸이지 않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0점이라 다행이라는 생각.

과배란 11일, 채취일부터 피검일까지 슈게스트 16일, 이식 후 피검일까지 크렉산 11일.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배와 엉덩이에 매일 주사를 맞으면서도 두드러기가 없으니 다행이라는 생각.

힘이 되어주고 언제나 나를 지지해주는 남편이 있으니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


물론,

슬프다. 속상하다.

사실 이식 후의 그 기간이 마치 꿈같이 느껴진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마치 꿈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을 살아가듯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종일 동동거리며 움직이고, 밀린 집안일을 하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못했던 운동을 땀 흘려가며 하면서도 문득문득 지난밤의 꿈이 떠오르듯 툭 튀어나오는 서러움이 있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겠다. 외면하는 것보다는 당당히 마주하고 이겨내야지. 누가 보면 웃다 울다 정신 나간 사람 같기도 하겠지만 그게 내 정신건강을 위한 길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야 다시 또 일어나고 나아갈 수 있을 테니 기꺼이 감정에 충실해야겠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내가 있었다. 이후의 글이 비공개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보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감정에 충실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허우적거리는 동시에 절벽 끝에 겨우 매달린 손가락에 있는 대로 힘을 주어가며 바들바들 떨면서도 버텨내던 나도 보였다는 것이다. 그 손끝이 결국 나를 살려낸 걸 테지.


지난 시간의 나에게 수고 많았고 정말 애썼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렇게 춥고 어두운 겨울의 한 복판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스스로를 놓지 않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비록 바라던 삶은 아닐지라도 기나긴 겨울밤의 끝엔 따사로운 봄햇살이 기다리기 마련이며, 결국엔 더 많이 웃고 더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다정하게 말해주고 싶다.


그 시절의 나에게 안부를 묻고 위로와 감사를 전하는 사이 어느덧 커트와 샴푸까지 마친 남편이 지금의 시간을 내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미용실을 나오며 시술을 앞둔 원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굳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마음을 담아 눈빛으로 무언의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밖으로 나와 뚜벅뚜벅 발끝에 힘을 주며 걷는다.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그 시절의 나를 딱 그만큼 놓아준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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