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란과 운광의 Golden Wedding
오래된 앨범 속, 결혼식 사진에서 엄마가 웃고 있는 사진은 단 한 장뿐이었다. 그마저도 식과는 무관한 사진이었다. 대부분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설렘이나 즐거움을 띈 표정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싫었어.”
결혼도 하기 전부터 시작된 시누이의 말도 안 되는 시집살이도, 고운 웨딩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입은 것도, 신혼여행까지 따라오는 남편의 친구들까지도 모두 다 싫었다고.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마치 어제의 일들처럼 생생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며 기억에는 필터가 씌이기 마련이다. 필터에 따라 희미해지기도, 짙게 증폭되기도 하겠지. 엄마의 경우엔 안타깝게도 후자이다.
엄마에게 결혼은 족쇄였으며 꺾여버린 날개였으며 사라져 버린 청춘이었다. 아버지에게는 어땠을까. 결혼에는 엄마보다 아버지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으니 엄마와는 다른 답을 갖고 계실까. 아버지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당신의 속내는 도통 꺼내지 않는 분이니까.
“아유, 지겨워. 50년이 웬 말이야. 이렇게 50년이나 지지고 볶고 사는 사람은 없을 거야.”
기대하는 답이 있다는 걸 알지만 주위에 지지고 볶으며 50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을 열거한다. 50년 세월을 떠올리면서 지겹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마음으로 느껴지는 세월이 말도 못 하게 길게 느껴질 만큼 고단한 세월이었다는 얘기였겠지. 아무래도 좋았던 순간보다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더 깊고 오래 남는 법이니까. 이삼일에 한 번씩 전화를 걸어 30분 이상 통화를 하는 엄마는 이따금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꺼내오곤 하는데 대부분이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이었고, 그 끝은 언제나 아버지를 향한 원망으로 가득했다.
보통은 한쪽 귀로 들어온 화살이 다른 한쪽 귀로 빠져나가지만 간혹 화살이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내 마음속에 박히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상하고 괴로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살지 그랬냐는 말을 뱉곤 하는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너희가 있는데 어떻게 그래. 그냥 참고 사는 거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는 알까. 그렇게 들었던 너희들 때문에 참고 살았다는 그 말이 마치 갚아야 할 빚처럼 차곡차곡 쌓여갔다는 걸.
답답한 마음에 어느 날엔 정말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엄마는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을 했지만 이내 그동안 한 적 없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가족은 지금은 수유동으로 불리는 수유리에 꽤 오래 살았었다. 동네엔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결혼기념일이 되면 아빠는 국수를 좋아하는 엄마를 데리고 시장의 국숫집에 가서 막국수를 먹었다고 했다. 비빔국수도 아닌 막국수. 그 시절엔 그게 참 별미였고, 다른 것 없이도 막국수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조금 올라간 목소리 톤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한 번도 좋은 적이 없었다고 말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마 아버지와 함께 막국수를 먹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으리라.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괴롭기만 한 건 아니어서. 그리고 내가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시간들이 또 있을 것 같아서. 지난 50년을 하나로 본다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힘든 시간이었다 해도 이렇게 입가에 옅은 미소라도 지을 수 있는 가뭄 속 단비 같은 순간들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안타까웠다. 부모를 보는 자식의 마음과, 한 사람을 보는 또 한 사람의 마음이 충돌하고 있었다.
다른 해는 몰라도 올해는 50주년이니 챙겨야 하지 않겠냐는 오빠의 말에 가족들이 모여 소소하게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엄마를 웃게 만들었던 막국수를 먹지는 않았지만 준비해 간 음식과 케이크 앞에서 웃고 사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낮에 정신없이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부모님은 웃고 계시는데 난 왜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지난 50년의 세월이 주름의 사이사이, 검버섯 아래로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사진을 몇 장 넘기니 촬영을 위해 잡았던 자세가 풀리고 웃음기가 사라진 모습이 찍혀있다. 그 사진을 보는 나는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마치 연극이 끝난 후 무대 뒤 배우들의 긴장 풀린 모습 같기도 했고, ‘그래, 이게 진짜지’하는 조금은 쌉싸름한 안도감 같은 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50년 전의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번갈아 본다.
그럴 거면 그만 살지 그랬냐는 말 따위 집어치우고, 고단했던 세월 잘 살아주시고 녹록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