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데 산티아고
우리나라에 산티아고 순례길로 알려진 카미노(정식 명칭 :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부지역 약 800km를 걸어서 횡단하는 여행이다. 길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결혼 전 아내가 카미노를 가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났다. 둘이서 함께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는 여행이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바로 떠올랐다. 평소에 걷는 것을 많이 좋아하거나 등산을 취미로 가진 것도 아니다.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았고, 용기를 냈다.
카미노는 요즘 유행(?)하는 아래 유형들의 여행이 아니다.
랜드마크 돌며 사진 찍기
식도락
휴양지 리조트에서 놀기
카미노는 스페인의 기후 변화, 지역적 특성, 역사, 문화, 사람과 같은 디테일한 것 까지 느낄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다. 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난 극 내성형 인간이다. 게다가 영어도 못하니, 만나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대부분 그들은 아내와 소통했다. 나의 이런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한국에서는 잘못된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 나에게 삐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도 나를 오해의 눈길로 바라볼 것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있었다.
어느 날 말이 없는 나를 그들은 있는 그대로, 그냥 성향이 다른 한 명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여 주었음을 느낀 적이 있었다.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여행 중 만난 친구 두 명과 서로 다른 시간에 각자 나와 사진을 찍었는데, 둘 다 내 어깨를 다독이듯이 만져주었다. 그때, 그동안 내가 마음을 다 전달하지 못했음에도 그들이 나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위기와 그들의 눈빛에서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런 마음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극 내성형인 내게,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있다면 조금 더 다가서자고 다짐을 하게 했고, 또한 영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들은 나를 변화시켰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에 20~30km를 한달 이상 걷는 여행이다. 결코 쉬울 리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육체적 준비를 하지 않았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됐다. 바로 첫날 목적지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식당에서 숙소로 걸어 돌아가기 어려울 만큼 다리가 갑자기 아팠다. 계속 걸어야 하는 여행인데 첫날부터 여행을 망치게 될까 밤새 걱정하며 중간중간 일어나 다리를 마사지하고 멘소래담을 발랐다.
둘째 날 여전히 다리는 아팠고, 비도 오기 시작했다. 절뚝절뚝 걷다가 목표치만큼 걷지 못하고 중간지에서 겨우 숙소를 찾아 묵게 됐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계속 걷다가는 다리가 불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도 엄습했지만 이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남들보다 2~3일 뒤쳐지면서 하루에 15~30km씩 10일간을 더 걸었다. 어떨 때는 괜찮았지만 어떨 때는 많이 아파왔다. 한쪽 다리가 괜찮아지면 반대쪽 다리가 아팠다. 주변 사람들도 걱정이 되었는지 하루 이틀 걷지 말고 휴식할 것을 권했다. 처음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이 나를 덮쳤고, 가지고 온 약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마음은 점차 차분해졌고, 내 몸을 조금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내 다리는 조금이지만 점차 회복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이내 걸은지 10일이 지났을 때 믿기 어렵지만 다리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우리 몸은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치유능력이 있음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끼게 됐다. 약은 아무리 먹고 발라도 소용없다. 그냥 믿고 기다려주고 쉬어주면 된다. 절뚝이는 다리로 매일 15~30km를 걸었음에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결국 스스로 치유됐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조금만 아프면 병원을 찾고 약을 찾는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이해하고 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과연 편리해진 이 세상이 우리에게 이롭기만 한 걸까? 몸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지만,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가능성 또한 마찬가지라고 본다. 살다 보면 고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하고 초조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리는 이 어려운 세상을 생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진화되어왔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그만큼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의 맥락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내가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의 가능성을 보고 느낄 수 있었을까? 내가 이 어려운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최고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쉽고 편한 것에 발전은 없다. 진정한 성장은 어렵고 힘듬을 겪는 과정에서 온다.
여기서 여행을 통해 만난 친구 두 명의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운동하는 직업을 가진 한국인 청년 A 씨는 생각보다 걷는 것이 쉬웠다고 한다. 평소에 단련된 몸 덕분인 것 같았다. 그래서 굉장히 아쉬워했는데, 얼마 전에 베드 버그(침대에 서식하는 벌레로, 물리면 간지럽고 두드러기가 난다)에 물린 상처가 자신이 여기에 와서 얻은 영광의 상처인 것 같아 기뻤다고 했다.
한국인 남성 B 씨가 다리를 절고 있는 프랑스 청년 C에게 자신이 가져온 약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프랑스 청년은 '이 아픔을 그대로 느끼면서 걷고 싶다. 인위적인 도움을 받고 싶진 않다' 고 하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공통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앞에서 말했던, 어려움을 통해야만 진정한 성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내가 이런 깨달음을 알게 된 이후에는 나에게 어려운 상황이 와도 불안보다는 오히려 마음 한편에 내가 더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는 실제로 결과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문명이 발전하면서 현대인들은 더 쉬운 것을 찾는 것 같다. 복권에 당첨돼서 퇴사하고 싶다는 사람, 돈을 쉽게 벌기 위해 가상화폐로 투기를 하는 사람, 아이를 쉽게 낳으려고 무통주사와 제왕절개를 선택하는 사람,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켜는 사람, 10분 거리도 걸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 그 외에도 너무 많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들 전부 결과적으로 본인에게 조차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이와 관련해서 이후 몇 가지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카미노는 굉장히 단순한 여행이다. 하루의 대부분을 걷고(10시간 이상 걷는 날도 많다), 먹고, 씻고, 모여서 이야기하고, 자고, 다시 또 걷는다.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걷는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폭설이 내려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도 걷는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걷기만 해도 그냥 행복했다.
그런데 다시 집으로 그리고 도시로 돌아오니 삶이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행복하지만도 않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행복은 단순해도 충분한데.. 아니 오히려 단순함 속에 있었다.
하루에 길게는 10시간 이상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사색과 명상을 반복하게 된다. 사색은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깊이 있게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다. 명상은 어렵게 느껴지는데, 별거 아니다. 그냥 멍 때리고 있으면 명상이다. 즉, 생각을 비우면 된다(단순히 멍 때린다기 보다 생각을 비우고 나와 주변에 집중하는 느낌에 가깝다). 일상에서는 이것이 쉽지 않은데,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몸이 힘들어지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멈추게 된다. 그래서 카미노를 걷는 많은 과정은 사색에서 시작해서 명상까지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과정이었다. 이 순간만은 나는 고뇌하는 철학자가 된다. 걸으며 도달한 결론 중 하나로 멋들어지게 다음과 같은 이름을 붙여보았다.
삶의 종속 제거를 통한 본성의 회복
개발자라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종속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흔히 결합도를 낮추라고 하는데, 이는 모듈 간의 종속성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다. 서로 종속되어 있으면 하나를 수정했을 때 그 여파로 다른 모듈도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굉장히 많은 종속성이 얽혀있다면 걷잡을 수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의 본질. 즉, 주인공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여기에 여러 종속적인 요소들이 개입하여 주인공인 나를 조연으로 밀어내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 가장 문제가 되는 대표적인 예는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너무 높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보다도 말이다.
그런데 진정한 부란 무엇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아주 옛날에는 화폐가 없었다. 그리고 자급자족했다. 하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적고 필요한 것은 많았다. 나는 농사를 잘 짓고, 옆집 사람은 도자기를 잘 굽는다면 쌀을 주고 도자기와 물물교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영 불편하다. 꼭 내가 필요한 물건을 가진 사람이 내가 가진 물건이 필요하리란 법은 없다. 사람들이 더 모여 살게 되면서 화폐를 도입하게 됐다. 바로 우리들이 가치를 인정하기로 약속한 쇠 덩어리 또는 종이조각이다. 하지만 화폐의 본질은 그냥 종이일 뿐이다. 더 나아가 현대에는 그냥 컴퓨터 데이터일 뿐이다. 화폐가 가진 가치는 우리 모두가 함께 가치를 부여하고 인정했기 때문에 나온다. 즉 진정한 부의 가치는 우리들 즉,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사람은 어떻게 그런 부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역사 이야기에서 살펴본 대로 놀고 싶은 것을 참고 시간을 써서 농사를 짓거나, 도자기를 구웠기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 진정한 부는 바로 시간이다. 돈이 필요하면 그냥 시간을 들여서 뭐라도 일을 하면 된다. 별거 아니다. 단, 같은 시간을 사용하더라도 사람마다 효율이 다르다. 시간 대비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사람이 부자다. 그럼 내가 부를 얻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가상화폐에 투기를 할 것이 아니라, 복권을 살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 대비 고효율의 가치를 내기 위해 자신 스스로를 연마하면 된다. 공부하고, 더 열심히 연습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나를 찾으면 나는 부자가 된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들은 많다. 유명한 IT 계열의 부자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과 같은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갈고닦아 만든 소프트웨어로 부자가 된 것이지 투기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에게 투자하지 않고 엄한 곳에 투자를 할까?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보다 돈이 더 가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돈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을 주객전도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돈을 벌어서 뭘 할 거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된 답을 못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그냥 뭘 사고 싶은데 돈 생각하는 게 싫어서 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차를 한대 사고 싶다고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마음의 거리낌 없이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서 라고 한다. 솔직히 이런 것들 모두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적당히 벌면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인데,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인인 사람은 돈은 그냥 인생을 살아갈 도구 중 하나로 필요하면 시간을 써서 필요한 만큼 벌면 그만이다. 딱히 많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없다. 필요한 만큼 벌어 필요한 곳에 사용한다.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매달려 시간을 사용하고 자신의 가치를 높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그냥 부자가 된다.
나 스스로가 삶의 주인으로서 다른 것에 종속되어 좌지우지되지 않아야 자신이 가진 본래의 힘을 발휘하고 원하는 삶을 살며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