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오일여행자 Apr 24. 2017

짐 없이, 집 없이

50개의 다른 집, 50개의 다른 삶

짐 없이? 집 없이?


-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그런데 너희들 정말 짐이 그것뿐이야? 그리고 하나 더,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여기가 너희의 몇 번째 집이니?


종종 새하얀 대문의, 때로는 빨간 테라스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봄냄새를 닮은 목소리로 그들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 두 가지는 당연히, 짐과 집에 대한 것이다. 짐이라곤 각자 들고 있는 작은 가방 하나씩이 전부인데다, 1년 동안 50개의 에어비앤비를 이용한 우리의 경험 역시 특별하기 때문이다. 짐도 없고, 집도 없는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늘 이상한 질문이 되곤 한다.

@Denmark Copenhagen, weekdaytraveler

우리는 1년의 여행 끝나갈 무렵, 배낭 속의 짐을 10분의 1로 줄였다. 20kg이 넘던 가방을 각자 20여 가지 정도의 꼭 필요한 물건들만 남겨 작은 프라이탁 가방 안에 각각 담았다. 짐 없이 다니는 여행은 모든 면에서 전보다 자유로웠다. 늦은 시각에 무거운 배낭을 들고 겁먹은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딱 1분이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갈 준비를 마칠 수 있다. 시간의 제약과 무게의 구속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셈이다. '짐'과 '집'이라는 닻을 풀어버린 채, 우리는 더 넓은 바다로 나가는 돛단배처럼 항해를 시작했다. 그렇게 집 없이 여행한 지 400여 일, 짐 없이 여행한 지 60여 일이 지나고 있다.

@Italy Venice, weekdaytraveler

50개의 집


- 짐은 정말 이것뿐이고, 집은 글쎄. 없기도 하고 아주 많기도 해. 50개쯤 있으려나?


새로운 에어비앤비 식구들이 집에 대해 물으면 우리는 이제 50개의 집이 있다고 말한다. 한국의 집을 정리하고 떠난 여행에서 우리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두달 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한 집을 꾸리는 여행을 해왔기 때문이다. 포근하게 잘 마른 이불과 수건, 따뜻한 밥을 지어먹을 수 있는 간단한 조리 도구들, 통화를 할 때면 습관처럼 필요한 소소한 펜과 종이, 그리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찬바람 부는 밤에는 두툼한 코트를 빌려주며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짐 없이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고, 집 없이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들의 일상을 우리와 빠짐없이 공유해준 이들을 떠올리면, 우리에게는 이미 50개의 집이 있는 셈이었다.

@Germany Berlin, weekdaytraveler

예전에는 무거운 배낭 때문에 터미널 가까이에 위치하거나, 관광지들이 모여 있는 중심지에 위치한 집을 먼저 찾아보았다. 하지만 짐을 줄이고 가볍게 여행을 하면서, 우리와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집들을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한 대중교통에,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지역이라도, 우리가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이들의 집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자신이 공들여 가꾼 집을 기꺼이 우리에게 내주고, 자신의 삶 속으로 낯선 우리를 초대해주었다. 결국 오랜 기간 짐 없이, 그리고 집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에어비앤비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집을 선물해준 사람들 덕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50개의 집은 결국 우리와 일상을 공유한 그들의 삶이었다.


50개의 삶


우리는 세계 곳곳에 위치한 50개의 집에서 수백 번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집마다 달린 커튼의 무늬가 다르듯, 사람들은 출근하는 시간부터 자주 마시는 차까지 각기 다른 삶으로 작은 집들을 채워가고 있었다.

@Italy Salerno, weekdaytraveler

#살레르노의 다락방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살레르노에 있는 집은 낡고 오래된 빌라의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우리 방은 하늘과 맞닿은 작은 창이 달린 다락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작은 다락에 짐을 푸니, 달달한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이 집에서는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커피알람'이 된다. 모카포트에 진하게 끓인 커피 향으로 남은 가족들을 깨워야 하기 때문인데, 그 당번은 늘 예외 없이 집안의 할머니셨다. 북부의 커피는 맛이 없으니 살레르노에 있을 때 좋은 커피를 많이 마셔두라던 할머니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자주 진한 커피를 마셨다.

@Italy Salerno, weekdaytraveler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교통은 매우 불편했지만, 산책하기 좋은 조용한 동네인 데다, 바다가 가까워 참 좋았던 집이다. 뒷마당에는 빌라 사람들이 함께 가꾸는 커다란 레몬 나무가 있어 나무를 가꾸고 레몬잼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문득, 월세 비싼 대도시에서 사람들에 치이고 밟히며 출근하던 아수라장 같은 도시를 떠나 교외의 작은 다락방에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가꾸는 나무가 있고, 적당히 달콤한 레몬청을 만들어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일상이 더욱 충만하겠다는 상상을 해보게 되었다.


#탈린의 잭스패로우가 사는 집

@Spain Valencia, weekdaytraveler

에스토니아 탈린의 집은 젊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사무실 겸 거주공간이었다. 오전 회의시간에는 집 전체가 회의실 인양 열심이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차려먹는 식구가 된다. 이 집에서는 무엇이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디자인 기능이라곤 전혀 없는 집안 가구들이 대부분 시내에서 주워온 것이거나 직접 만든 물건이기 때문이다. 삐그덕 거리는 소리는 물론, 잔고장도 많다. 이 집에서 지내면서 우리는 시내를 돌아다니다 멀쩡해 보이는 가구가 보이면 꼭 집에 들고 오는 습관이 생겼다.

@Estonia Tallinn, weekdaytraveler

지루해서 대학을 때려치우고 집 안에서 자기 일을 만들어간다는 당당한 친구. 이 친구와 함께 망가진 가구들을 고치다보면, 어쩌면 조금 별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진다. 주워온 것들로 꾸민 집, 자동차 없이 자전거를 타는 삶, 일주일에 외식 한번 하지 않은 그의 일상이 가난하기보다 자유로워보였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그의 삶은 자신이 설계하고 주도하는 것이었다. 그의 집은 엉성하지만 제 손으로 지은 배였고, 그는 그 별난 배의 선장, 잭 스패로우처럼 보였다. 조금 이상한 집에서, 조금 별나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오로라와 이웃하는 아이슬란드의 집

@Iceland Stokkseyri, weekdaytraveler

아이슬란드 스토크세리의 집은 시내와 뚝 떨어진 작은 마을에 위치해있다. 큰 슈퍼마켓은 차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기에, 우리는 늘 주변의 이웃들과 자주 만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차가 없는 우리를 위해 이웃들은 늘 우리 집으로 찾아와 슈퍼에 갈 일이 있는지 먼저 묻고, 저녁 반찬이 부족해 보이면 함께 밥을 먹자며 우리를 불러냈다. 전에 없던 살가운 이웃들이 생긴 것이다. 한 달동안 이 집에 머물며 동네 산책부터 이웃집 개를 산책시키는 일까지 이웃들과 함께 하는 일상에 익숙해져갔다.

@Iceland Stokkseyri, weekdaytraveler

아이슬란드의 겨울에는 매일 같이 일기예보를 확인해야 한다. 눈폭풍이나 비, 바람의 정도에 따라 대비해야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바람기호도 겨우 읽는 우리를 위해 늘 중요한 날씨 정보를 수고스럽게 알려주곤 했다. 오로라 예보를 미리 알려주고 오로라가 잘 보이는 동네에 숨겨진 명소를 지도에 표시해주던 사람들. 길고 긴 아이슬란드의 겨울밤을 그런 이웃들과 함께 보내며 우리는 여행 전에 우리가 살던 집을 자주 생각했다. 같은 모양,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면서도 바로 윗집에 누가 사는지, 아래층에는 누가 이사를 왔는지, 관심도 없던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집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지낸 50개의 집은 그렇게 서로 다른 일상과 각기 다른 삶의 모습을 담은 그릇이었다. 어떤 집은 도시와 뚝 떨어진 곳에 위치하기도 했고, 나라마다 방의 크기와 부엌의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그들은 규격화된 아파트에 살기보다, 이름 있는 브랜드의 주소지를 선택하기보다, 각자의 삶에 맞는 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집이라는 그릇에 담길 삶의 모습을 먼저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Alin Meceanu

문득 똑같은 모양의 아파트에서,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아침마다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넣으며, 덮쳐오는 야근의 파도를 넘으며, 이 삶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우리는 우리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같은 일과를 반복하며, 집을 사기 위해 살아갈 뿐이었다. 우리 역시 이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똑같은 모양의 집을 '사는' 데 몰두하느라, 그 안에서 '사는' 삶을 먼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Denmark Copenhagen, weekdaytraveler

여행을 통해 얻은 50개의 집에서 우리는 조금은 다른 삶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이슬란드의 집에서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이탈리아의 집에서는 사람들을 도시의 아파트로부터 모두 탈출시키는 발칙한 계획을, 에스토니아에선 일에 휘둘리지 않고 일상을 주도하는 잭 스패로우의 삶을 상상해보았다. 똑같은 아파트를 사서 남들과 비슷한 평수에 내 삶을 입주시키는 대신, 나의 인생을 닮은 나만의 집을 수많은 도시에 만들어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다른 집, 다른 삶


우리가 짐 없이 여행하고, 집 없이 산다고 하면 어떤 이들은 조금 안쓰러워하고, 어떤 이들은 유별나다는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우리는 짐도 없고 집도 없으니 가난하고 유별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짐으로 가득 찬 하나의 집 대신, 세계 여러 곳에 50개의 새로운 집을 만들었으니 오히려 아주 풍요로운 셈이다.


그런 우리의 집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하지만 똑같은 집에 살면서, 다른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할까? 다양한 모양의 집이 있다는 건, 결국 다양한 삶도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50개의 집에 담긴 50개의 삶을 경험하며 집을 '사는' 것보다 자기만의 삶을 '사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배웠다. 우리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무엇이고, 그와 어울리는 집은 어떤 모양일까?  

@Norway Hordaland, weekdaytraveler

우리는 지금처럼 가벼운 차림으로 살아갈 우리만의 집을 만들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짐이 2kg이라면, 인생을 짓는 데 필요한 집은 20kg이면 충분할 것 같다. 조금만 소유하는 대신 의미 있는 삶을 고민하는, 내가 소중히 하는 것들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가방 두 개가 전부인 우리의 여행처럼, 단순한 삶을 담아낼 수 있는 가벼운 집이면 좋겠다. 호수와 산을 앞에 둔 작은 자동차집, 혹은 거실 대신 정원이 전부인, 아니면 여럿이 모여 한 집에 이루는, 그리고 짐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텅빈 집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세계 여러 도시의 100개쯤 되는 집이 생겨서 집 주소를 적는 칸이 좁아 난감해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앞으로는 모두가 '다른 집'에서, 모두가 '다른 삶'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